누워있는 남편 얼굴 위로 입술을 한껏 내밀고 침을 살짝 내뿜으며 뱉을까 말까 장난을 쳐본다. 과거 남편도 내 어깨 스트레칭을 도와주며 얼굴 위에서 침을 뱉는 시늉을 많이 했기에 '너도 당해봐라'라는 마음으로 장난을 한 건데... 남편은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나 이거 트라우마 있어~ 예전에 OO형이 내 몸 위에 올라가서 침 뱉는 척하다가 조절 못해서 진짜 침 떨어졌다니까... 아 진짜... 최OO 개새끼!"
남편은 내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따라 해 봐~ 최OO 개새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다. "최OO 개새끼"
남편은 언제 짜증 났냐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따라한 나에게 "고마워~ 같이 욕해줘서~"라는 말을 한 뒤 낮잠을 자겠다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오래전 대학입시 결과를 앞에 두고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믿고 대학 합격을 맹신하던 어린 시절... 나는 불행하게도 낙방의 쓴 맛을 경험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예비 3번이라니!!! 이건 학교의 비리가 분명해! 내가 왜???? 이런 더러운 세상~ 난 학교에 불을 질러버리겠어!!'
매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학교에 불을 질러버리겠다!"는 말을 반복하던 내가 있었다.
나의 말을 옆에서 듣던 친구 중 한 명이 "한나야... 네가 다른 건 잘했을지 몰라도 내신이 안 좋았잖아. 그 학교가 내신도 많이 본다며~ 너 그래서 떨어진 거 아니야??"라는 아주 바른말을 쏟아냈다.
너무나 예리하고도 정확한 말을 들으며 '아~~~ 바로 내가 이 이유 때문에 대학에 떨어진 거구나... 맞네... 맞아...'라는 생각이 들었.... 기는커녕... '진짜 똥 밥맛이다. 그래 너 잘났다... 너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아댔다.
반면 다른 친구는 나를 쿡쿡 찌르며 "야! 나랑 같이 가~ 불 질러버려~~ 내가 기름통 같이 들어줄 테니까!"라는 말을 하며 나를 두둔했다.
오래전 같이 불 지르자던 그 한마디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이후 나는 그 친구와 어디서 기름을 구할 것인지, 라이터는 누가 가지고 올 것인지 등 어떻게 불을 지를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잘못된 생각에 비난하지 않고 그저 내편이 되어준 친구의 한마디로 인해 마음을 추스렸던 것은 아닐까싶다. 찌질하고 별 볼 일 없는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있어 고맙고 행복했던 것은 확실하니까...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이 쓴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읽으며 눈에 띄는 글귀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바른말은 의뢰로 폭력적이다.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러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20년 전 내 속에 불질렀던 친구한테 외쳐본다.
"야!!! 나 내신 안 좋았다!!! 굳이 네가 말 안 해도 알았거든~! 꼭 힘들어하는 나에게 그래야만 했니??!!!"
과연 바른 말쟁이는 과거의 친구뿐이랴...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바른말을 많이 한다.
가르치는 직업 때문인 건지 무슨 말만 들었다 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평화의 메시지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다. 개뿔!! 나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얼마나 충고하고, 얼마나 조언하고 싶은지 아주 간질간질거리는 입을 열지 않기 위해 마음에 '참을 인'을 수도 없이 새긴다. (대부분 미션 실패)
조금 나이를 먹었다고...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사람에게 도와주겠다고, 바른 길로 안내하겠다고 나불거리는 말은 교육이라는 거죽을 쓴 채 폭력을 행사하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