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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Sep 29. 2022

'저 잘 살고 있어요.'

"엄마... 나 진짜 짜증나서 그림 못 그릴 거 같아... 흐흐..."


대학입시 7개월을 앞두고 디자인을 전공하겠다는 딸아이는 여름 방학부터 지금까지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또 그린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면서도 몸이 힘들지 마음은 괜찮다는 딸아이를 보며 뒤늦게라도 가고 싶은 길을 찾아 달려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그렇게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바쁜 삶을 살아가던 중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할 딸아이가 내 핸드폰 화면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 딸아이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내가 그리는 예수님 그림 말이야. 나도 표현하고 싶은 느낌이 있어서 부드럽게 표현하는데... 원장님도 보시고는 선이 좋다 하시고, 실장님도 선이 좋다고 하면서 계속 그 느낌으로 표현 잘해보라고 하시는데... 자꾸 선생님이 와서 부드럽게 그리지 말라고, 거칠게 그리라고, 네가 이래서 느린 거라고... 물론 그 선생님도 자기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는데... 이미 다 그렇게 그리기로 한 건데 그릴 때마다 옆에서 그러니까 짜증나 미칠 거 같아... 나 어떡해?"


다행이었다.

강의하는 시간과 겹치지 않아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속상한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와 한 팀이 되어 한참 선생님의 흉을 보니 아이의 마음은 서서히 내려앉은 듯했고, 아이는 이내 묵직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엄마, 나 정말 어떻게 해야 될까?"

"그래... 어떻게 해야 될까? 조언을 묻는 거니 엄마 생각을 이야기해볼게. 엄마는 다민이가 할 말은 했으면 좋겠어. 그건 예의 없는 게 아니야. 다만 선생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정중하게 이야기하면 돼. 만약 엄마라면 선생님 '정말 그렇게 그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다만 제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전하고 메시지는 어쩌고 저쩌고~~~ 였거든요. 그래서 이런 느낌으로 표현해 보고자 했어요. 지금 당장은 거칠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방법도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안 될까?"


아이는 곧장 말을 이었다.

"내가... 내가 말할 수 있을까?"

"한 번만 용기 내면 되는 거야. 엄마도 그런 말은 잘 못했는데 하니까 되더라고!"

그렇게 아이는 전달해야 할 말들을 수차례 연습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필요한 것도 말하지 못하고, 물어야 할 것도 묻지 못하고, 거절도 못했던 내 모습...

이전에 사업체를 운영하며 계약에도 없는 무리한 것들을 요구하는 고객사에 쩔쩔매는 나를 보며 가족들은 "왜 말을 못 해? 예스맨이야? 바보도 아니고...!"와 같은 말들을 하곤 했다.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들 시험 전날에 새벽 3-4시까지 원데이 영어 과외를 해서 점수를 바짝 올려주곤 했는데, 간혹 과외비를 먹고 튀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 싸워서 뭐하겠니? 먹고 떨어져라!'라는 마음으로 나는 감정 소모 자체를 피했다. 임신 막달에는 날을 새 가며 인터넷 강의를 찍었는데 회사가 망해버려 강사료를 주지 못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강사들이 모여 항의했지만, 나는 모임에 한 번 나가고는 '안 받고 말겠다'는 빠른 포기를 선택했다. 이 뿐이 아니다. 사업체를 운영하며 몇 달간 밀린 교육료를 받지 못해 내 돈으로 선생님들 월급을 막았는데... 그곳 역시 준다 준다 하더니 돈을 들고 날랐다.

"이런 이 그지 같은 것들!!!!!!!!!!!!!"


누군가는 내게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냐고 물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착한 척을 하려는 것도, 고객을 잃을까 봐도 아니다.

그냥 그런 불편한 말이 입에서 잘 안 떨어지는 DNA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등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그냥 내가 손해 보는 게 차라리 편했기에 그것을 택한 것뿐이었다.

그런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당장 너의 것을 요구하라고,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그만두라고, 왜 그러냐고 사냐고'의 말들은 삼가해 주길 바란다.

나도 할 만하니까 하는 거고, 견딜만하니까 입을 다무는 것이다.

제발 당신의 저울에서 나를 내려놔 주길...


이렇게 글을 쓰니 딸아이를 향해 "왜 말을 못 하니... 네 권리도 못 찾으면 어떻게 살래!!"라며 타박하던 모습이 떠올라 미안해진다.

-왜 말을 못 하냐니... '말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편했으니 안 했겠지.'

-내 속이 왜 터지니... '걔도 속 안 터지고 잘 이겨내고 있는데...'

그저 견디고 버텨내는 지점이 다를 뿐인데...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두어야 하는 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샀던 내가 이제는 내 돈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화를 내지 않고 얼마나 공손하게 내 것을 챙기는지 아는가?! 그것뿐이 아니다. 강사료도 물어보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원하는 강사료를 받기 위해 조율도 한다는 것이다.

지켜야 할 내 가정, 내 직업, 내 경력, 내 자긍심까지도 보호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말을 하고 있다.


그저 당신과 내가 말이 터지는 임계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제발 나를 향해 '속 터진다'는 말은 넣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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