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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Sep 14. 2022

시어머니가 준 명절 선물


"어머니~나 정도면 괜찮은 며느리 아니야? 어머니는 며느리 잘 얻었다니까~"

어머니는 지지 않았다.

"나도 백 점짜리 시어머니야! 너도 시집 잘 온 줄 알아~~"

그렇게 서로를 칭찬하며 마무리되었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했는데... 나는 오래전에 꼭꼭 숨겨놨던 마음을 불쑥 밖으로 내보냈다.

"어머니가 결혼 초에는 백점은 아니었는데... 나 미워했잖아~ 나 솔직히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거 있어."

놀란 어머니는 "뭔데? 뭘 담아뒀는데?"라고 물었고, "어머니~ 나 진짜 이야기해도 돼? 진짜 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18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시작된 오래전 나의 이야기.

"어머니 나 서울 살 때 형님(남편 누나)이랑 다 같이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적 있잖아. 나도 임신했었고, 형님도 임신했을 때야. 어머니가 시골에서 오빠 먹으라고 무슨 약을 해왔는데 그거 나한테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임신했으니까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랬어.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지. 근데 형님한테는 그 약을 주면서 이거 몸에 좋은 거니까 먹으라고 했잖아! 나한테는 먹지 말라고 그러더니 형님은 먹으라고 그러고. 내가 그때 얼마나 서운했는데~~ 어머니 왜 그랬어? 내가 먹는 것도 싫을 만큼 미웠어?"

어머니는 당황해하며 "내가? 내가 그랬니? 어머 웬일이라니..."라는 말을 하더니 잠시 머뭇거렸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니 말이 맞겠지.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는 걸 보면 니 말이 맞을 거야. 그런데 난 왜 그랬나 모르겠다... 이렇게 오래 기억하는 거 보니 너도 많이 서운했나 보다... 아이고 그때 내가 왜 그래 가지고... 미안하다... 이제는 잊어버려라..."

그렇게 차 안에서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와 나는 과거에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소리 내 웃기도 했다. 다행히 차에서 내려야 하는 마지막 시점에는 '백 점짜리 며느리, 백 점짜리 시어머니'라는 깔끔한 결론에 도달하며 서운했던 마음은 날려버리기로 했다.


차 안에서 나눴던 어머니와의 대화가 좋았다.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나는 친정 엄마와 아빠를 붙잡고 톤이 잔뜩 올라간 목소리로 어머니와의 일을 이야기해댔다.

"세상에~ 내가 얼마나 감동받은 줄 알아? 내가 하는 옛날 이야기에 '기억도 안 난다. 그게 뭐라고 지금까지 담아뒀니?' 이럴 줄 알았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했던 거 줄줄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근데 글쎄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는 걸 보면 니 말이 맞겠지.' 라고 말씀하셨다니까! 이 말 한마디에 얼마나 울컥했는지 몰라. 우리 어머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니까!"


내 마음에 한참을 머물러 있던 감동은 새로운 다짐을 만들어냈다.

'나도 꼭 저렇게 말할 거야.
누군가 나에게 서운함을 털어놓을 땐 꼭 보듬어주는 사람이 될 거야!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다짐을 하면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사건이 금방 일어난다.

바야흐로 다짐에 대한 진실성 테스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딸!! 요즘 네가 바빠서 비올라 선생님이 명절 마지막 날 오시기로 했던 거 알지? 점심 먹기 전 11시야~~ 까먹지 말고!"

친절한 스케줄러로 빙의해 아이에게 한 번 더 설명을 해주는 나를 향해 아이는 버럭 짜증을 낸다.

"왜 11시야? 7시라고 했잖아. 갑자기 왜 시간이 바뀌는 건데?"

난 7시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 아이는 분명 본인이 듣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멈추고 심호흡을 하는 사이 남편이 끼어든다.

"나도 7시라고 들었음."

'아... 이것들이 세트로!!!!'라며 성질보다 약한 승질을 부리고 싶었으나... 시어머니를 보며 다짐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는 걸 보면 니 말이 맞겠지." 이 명언을 어찌 잊을쏘냐!

마음을 가다듬고 어머니처럼 말해본다.

"두 명 다 7시로 기억하고 있는 거 보면 내가 그렇게 말했나 보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 말했나 봐. 우리 딸 엄마 닮아서 오전에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데... 어쩌지??"

할렐루야!~ 지금 나에게 무언가 찾아온 것이 확실했다. 천사의 마음이 담긴 엄마의 말에 딸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아."라는 말을 건넨다.


그랬다.

내 서운했던 마음이 어머니의 넓으면서도 따뜻한 마음에 푹 잠기었고, 그렇게 어머니의 마음을 받은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나는 이번 명절에 스팸 선물세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선물 받았다.

'어머니 고마워요. 내 마음을 받아줘서... 어머니의 모습 꼭 마음 속에 새겨둘게...'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글로 써내며 흡족해하는 나를 향해 딸아이는 기어코 찬물을 끼얹는다.

"우리 할머니가 엄마를 다룰 줄 안다니까ㅋㅋㅋㅋㅋ"

"야~~~ 그것도 능력이거든!!! 할머니를 본받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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