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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Sep 06. 2022

네가 어디 가서 이런 남자를 만나니?


또 시작이다.

"야~~~ 네가 어디 가서 이런 1등 신랑을 만나니?? 키 크지! 착하지! (어쩌고 저쩌고) 넌 상위 5% 남자 만난 거야! 진짜 복 받은 거라니까~"

만날 때마다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는 남편의 고모님을 향해 있는 힘껏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는다. 그리고 코로 풍선을 분다는 마음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낸다. 왜? 나는 코로 말을 하는 여자니까!

"아~ 네네~~~ 알겠습니다~~ 저는 잘난 게 한 개도 없는데 이런 남자를 만났으니 그저 황송할 따름이죠~~ 알겠으니 제발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라는 전달되지 못할 말들을...

민망한 남편은 "고모~ 저 이런 이야기 여기서만 들어요~"라는 말만 연신 반복한다.


어제는 명절을 앞두고 시댁과 큰집 어르신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나이가 지긋하신 큰어머니는 나와 남편을 한참 바라본다. 갑자기 뭐가 생각나신 건지 큰어머니는 나를 부르며 "얘!!! 니 남편은 누굴 닮은 거니? 아빠를 닮은 건가? 아빠보다 더 잘생긴 거 같은데~ 참 잘생겼지?"라는 질문으로 내 대답을 강요한다. 오늘은 코가 아닌 입으로 대답을 한다.

"푸하하하하하~~ 오빠!!! 오빠는 왜 이렇게 잘생겨가주구~~~ 역시 큰어머니는 보는 눈이 있으시다니까!!!! 내가 시집 하나 잘 갔네~~~" (이렇게 하면 금방 종료됨)

나의 적극적 호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큰어머니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라는 말로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오리고기를 드신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남편을 바라보며 오늘의 시간을 정리해본다.

"여본 좋겠다~ 충청도 시골에서는 먹어주는 스타일이잖아~ 이쪽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오빠가 임영웅이야~~"

긴 하루의 여정 끝에서 피곤했던 나는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입을 닫고, 눈을 닫으니 내 마음에는 아지랑이처럼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서로 사랑하면서 예쁘게 잘 사니 참 좋구나 이러면 되지... 꼭 그렇게 말해야 되는 거냐고! 그리고 무슨 1등 신랑감이야. 솔직히 1등은 아니지~ 100명 중에 15등?? 그래! 15등이지~'

남편을 향해 등수를 매기고 나니 딱딱한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내렸다. 그렇게 바쁜 주말을 보냈던 우리는 새로운 한 주를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내 마음은 바빠졌다. 글쓰기 모임을 가입하고 활동 중인 나는 일주일에 두 개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몰아서 쓰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이번 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 이 모임에서는 하루에 한 명이 주인공으로 선정되는 제도가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글을 공유하고 남은 멤버들은 주인공의 글에 '좋아요'와 댓글로 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당장 내일인 화요일, 그날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되어버렸다.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슈퍼크루)이라니...'

점점 커져버린 나의 불안감은 어디론가 분출되어야 했기에 나는 남편을 불렀다.

  

정말 쓸 글이 없었다. 평온 하디 평온한 하루하루.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딸은 딸대로 각자 자신의 일을 마치고 집에 모여서는 온 열성을 다해 보드게임을 하다 잠드는 우리들이었다. 하지만 이 평온함이 글쓰기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으니 큰일이었다. 퇴근한 남편은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남편: 글 썼냐?

나: 아니

남편: 쓸 건 있고?

나: 없어. 진짜 한 개도 없어. 어떻게 보면 밋밋한 하루가 감사하기도 한데... 진짜 없다.

남편: 너 쓸 거 만들어줘? 진짜 구독자 한 번에 100명 늘려줘?

나: 뭔데???

남편: 내가 옷 벗고 밖에 나가서 똥 한 번 쌀게. 사진 딱 찍고 모자이크 처리해서 글 써봐. 너 진짜 대박 날 거야. 오빤 네가 잘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나: 아 됐어~~~ 더러워서 구독자들 다 나가겠다.


늦은 밤 어떻게든 글을 써야 한다는 마음에 식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틈틈이 "잘 써져?"라고 묻는 남편은 글이 완성될 때면 제일 먼저 내 노트북을 들고는 글을 읽어 내려간다.

내 글을 읽어주는 남편을 보니 연애할 때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며 내가 푼 문제를 채점해주던 모습'


이제 보니 내 모든 성장과정에 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가지 않고 버티는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원 앞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기다려주던 젊은 시절의 오빠.

대학교 4학년에 결혼하고 출산하느라 졸업을 미룬 나에게 졸업부터 하자며 복학을 권했던 신혼 초의 남편.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하겠다는 나를 늘 응원하며 끝까지 지지해주던 남편.

그랬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마다 뒤에서 밀어주는 그가 있었다.

연애시절 "핏덩이 같은 걸 내가 키웠잖아"라는 그의 말이 이제 와서 실감이 난다.

그는 나를 키워내고 있었다.


문득 바꿔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나도 그를 키워내고 있었을까?

나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가 걷고 싶을 때 함께 걸어주며,

그가 기대고 싶을 때 내 작은 어깨를 빌려주며,

그가 말하고 싶을 땐 내 입을 닫아주며,

그가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길을 찾아주고,

그가 하는 일에 열렬한 지지와 내가 가진 지식으로 힘이 되어주고자 늘 노력하던 나였기에...


글쓰기 모임의 '오늘의 주인공'인 나는 남편의 똥이 없어도 글을 완성할 수 있을 거 같다.

15등이라 매겼던 남편의 등수를 어른들 말씀처럼 1등으로 앞당기며 말이다.

나에게만큼은 그가 1등의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겨서가 아닌(진짜 아닌) 그저 나와 함께 커갈 수 있는 사람이기에...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있는 것.

-당신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

-딸아이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으며 허우적거릴 수 있는 것...

서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밀어주던 우리의 노력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p.s. 나는 행복하고 싶어 글을 쓴다. 오늘도 내 남편을 15등에서 1등으로 만들고 나니 나는 또 행복해졌다. 쓰기 싫었는데 쓰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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