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한나 Aug 14. 2022

결혼기념일엔 물구나무를 서요


"오빠 우리 결혼 기념일이 다가오네~ 우리 18주년 맞지??"

남편은 운전하다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그러네~ 벌써 그렇게 됐네."

나는 금세 말을 이었다.

"나 이벤트 해줘. 몇 년 동안 우리 그런 거 한 적 없잖아~ 이벤트 해 줘~~~"

방금 전까지 스윗했던 남편은 사라지고 남편은 자신의 부캐 '따지기 대마왕'으로 변신한다.

"야! 이제 그런 거 10년 단위로 하자. 힘들어~ 그리고 말이야~ 왜 받으려고만 해?? 네가 하면 되잖아~ 오빠가 받아줄게~ 네가 해 봐!"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친절하고, 상냥하며, 애교 많은 나는 다시 한번 더 남편을 꼬드겨보고자 결심했으나...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승부욕 넘치는 남편의 맞받아침으로 짜증나는 티키타카가 시작되었으니...

나: 잉~~~ 나는 이벤트 자주 해 주잖아~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편지도 많이 쓰고~~

남편: 알았어! 그래서 갖고 싶은 게 뭐야? 그때 말한 목걸이? 팔찌? 아님 가방?

나: 됐어~ 내가 언제 그런 거 좋아했냐? 왜 돈으로 해결하려고 그래?

남편: 접때 갖고 싶다며~ 기억하고 있는데도 그러네~ 사줄게~

나: 싫어. 카드값 무서워. 결국 생활비에서 사줄 거잖아.

남편: 그럼 무슨 이벤트를 해? 이제 웬만한 건 다 해본 거 같아. 진짜 할 게 없어.

나: 누가 스페셜한 이벤트 하래? 그냥 마음과 정성이 담긴 그런 거... 편지 하나를 써도 자발적으로 쓰는 거. 내가 맨날 편지지랑 펜 쥐어주고 방에서 못 나오게 해야 쓰는 그런 거 말고! 정성을 보이란 말이야!

남편: 오케이! 내 수고가 들어간 걸 원한다는 거지? 알았어. 그럼 너를 바라보면서 5분 동안 물구나무 서 있을게.  그리고 계속 사랑한다고 말할게~ 아님 여보 생각 생각하면서 엎드려뻗쳐하고 있을게.

나: 됐다... 됐어!!!


특별한 걸 바라는 건 아닌데... 내 마음도 몰라주는 야속한 아저씨...

괜히 이벤트 해달랬다가 할부로 뭘 사 갖고 오느니 그냥 물구나무 이벤트가 나은 건가 싶다...

난 왜 이토록 이벤트를 바라는 것일까?

설레는 마음을 갖고 싶어서? 예상치 못한 행복함을 누리고 싶어서?


문득 몇 달 전 종영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나온 대사가 떠올랐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7초 설레고, 10초 설레고 그렇게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4시간 중 눈뜨고 있는 18시간이 모두 행복할 수는 없지만... 순간순간 찾아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남은 시간들을 버티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이벤트를 바랐던 것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설렘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시간을 좀 더 달달하게 만들어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남편을 바라보고 말했다.

"회사생활 지긋지긋하지만 순간순간 즐거울 때 있잖아~ 그때 그 짧은 즐거움이 나머지 시간을 버티게 할 힘을 주기도 하는 거 같아~ 난 말이야~ 내가 오빠한테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어. 오빠가 힘들다가도 나 때문에 3초씩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물구나무 이벤트를 볼 바에 내가 이벤트를 하기로!!!!

나는 매일 밤 남편이 씻을 때면 작은 카드에 편지를 써 남편의 핸드폰 커버 속에 숨겨놓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나의 3초 이벤트~


그렇게 일주일간 남편에게 쓴 카드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카드를 모아보니 결혼기념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007 작전을 잘 수행한 스스로가 기특했다.

그뿐인가... 18년 동안 2인 3각을 하는 마음으로 한 가정을 이끌어갔던 우리들이 대견했다.

키도 안 맞고, 체격도 안 맞아 2인 3각으로 달리는 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까치발을 들었고 남편은 몸을 숙인 채 어떻게든 맞춰가며 달려갔던 시간들이 사랑스러웠다.


18년 참 잘 살아왔다. 나는 이번 소소한 이벤트를 계기로 마음에 잔잔하게 남는 바람이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24시간의 하루에서 3초의 행복을 받으려 하기보다 내가 먼저 3초의 설렘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남편을 놀래켜 주려 살그머니 편지를 넣고 기다리다, 다음날이면 "핸드폰 열어봐"라고 말하는 이 시간이 내겐 10초의 설렘이 되기에.  게다가 '3초 보다 더 좋다'라는 남편의 말에 10초 더 행복해지기에...


하지만... 이 큰 기쁨을 나만 누리고 싶지는 않다.

"여보~~~ 3초보다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려줄게. 물구나무가 아닌 다른 이벤트를 고민해 봐~~ 나에게 5초 행복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이벤트를 준비하면 20초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내가 어디서 봤는데~~~ 부부관계는 상호적이어야 되는 거래~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 주머니를 채워주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행복해진다는 거야~ 나 7장 썼으니까! 오빠도 한 장 제대로 써 와~~~"


다행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기 전에 나는 남편에게서 편지를 받았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 잘 가... 안녕...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