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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Aug 20. 2020

남편의 영어점수

남편은 영어 성적이 나오기 전날부터 긴장감을 드러냈다.

남편: 나 NH 나오면 어떡하지?

아내: NH는 모야? 농협이야?

남편: 아니... No Human. 제일 낮은 등급이지.

아내: 아... 노 휴먼~~~ 사람이 아니무이다!!라는 거야??

남편: ㅋㅋㅋ 아니 그건 아니고... N은 Novice(초보자) H는 High, Mid, Low... 이런 거야.  Novice(초보자) 나오면 회사 승진점수는 안되더라고...  근데... 진짜 나 딱 초보자 나올 거 같아. 에휴....

아내: 처음 보는 시험인데 왜 그래? 다시 또 보면 되지. 걱정하지 마! 그래도 내일 성적 나오면 꼭 알려줘~

남편: 아니... 절대...  절대!!!! 안 알려줄 거야.




다음날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카톡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그날부터였다.

남편의 진상짓은 정확히 퇴근 후부터 시작되었다.


남편: 오빠는 말이야. Intermediate(중급자)성적이 certificate(증명서) 있는 사람으로서 여보랑은 different(다른) 하다는 걸 말해주려고 해.  혹시 내 말이 너무 어려운 거 아니지? 아!!! 너는 영어 공인성적이 없지? 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딱 네가 알아듣게 이야기해줄게.

아내: 미쳤어? 진짜 어이가 없다 어이가... 중급 자라며? 고급자도 아니고... 나도 그 정도는 알아듣거든?


아이는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더니 기가 막힌 표정으로

"뭐 이제 영어로 대화하는 거야? 좋아"라며 빠르게 쌸라쌸라 거렸다.

그때 남편은 재빠르게 "으흠~~ 오케이. 아이 언더스탠드~ "하더니 나를 쳐다보며 "여보 또 못 알아들은 거야? 다민아!  엄마는 공인 점수가 없어서 잘 이해 못하니까 공인 점수가 없는 엄마 수준으로 천천히 말해줄래?"


그렇게 저녁 내내 진상짓은 이어졌다.

'정말 그렇게 좋았을까?'

늘 영어에 주눅 들었던 남편.

회사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못한다며 미팅도 부담스러워하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오늘 처음으로 어깨를 펴고, 신나게 잘난 척이 아닌 진상짓을 부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이제 좀 잠잠하겠지 생각하며 저녁 산책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끝나지 않았었다.

"오빠는 말이야. 오피셜 점수를 가진 사람으로서 ~~~~~~"

슬슬 지겨워진 나는 "오빠! 나도 오빠 수준의 영어는 할 수 있어. 그리고 다 알아듣거든!"이라고 맞받아치자마자...

"너 그게 바로 뇌피셜이야. 너는 공식적인 게 아니야. 네가 정말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오빠처럼 공인점수, 바로 오피셜한 점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너는 뇌피셜... 나는 오피셜! 오케이?"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그만 해야겠다. 저 인간이 오늘... 확실히 이상하다.

하루가 지나면 모든 것이 일상으로 되돌아가리라 믿으며... 나는 그렇게 마음속에서 '참을 인'자를 끝없이 새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남편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러나 한 가지... 이 남자 약간 다르다.


진상짓을 한 다음날부터 집에 오면 수다 떨다가 유튜브를 보며 깔깔 웃어댄다.

또 다음날도 열심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 웃어댄다.

또 다음날도, 그렇게 무려 한 달간....


"오빠 이제 공부 안 해?"

남편은 빙그레 웃는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오피셜 타령하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며

"중급자 오피셜 받아서 이제 안 하냐??  오빠 보니까 말이야... 어쩌면 꼭 오피셜이 좋은 거 같진 않아.

예전에는 자신이 늘 부족하고, 모자라단 생각에 열심히 정진하더니만...

그놈의 오피셜 점수 한번 받더니 무너지는구먼...

꼭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게 다 좋은 건 아닌가 봐. 오피셜 부작용이냐?"

라며 과거 나를 놀렸던 남편에게 쏟아부어대니 남편은 씩 웃으며 소파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분야가 무엇일까?

나도 남편처럼 된 모습은 없었을까?


나도 강사생활을 시작할 때 시강에서 1등을 했고,

오랫동안 강의한 곳에서 매년 우수강사로 선정되었다.


언제부턴가 늘 강의하던 자료에 변화가 줄어들었고, 그저 급하게 강의장소에 도착하는 내가 있었다.

수년을 돌이켜 봤을 때 제자리걸음이 더 많았지, 초보때처럼 좋은 강의를 하려고, 풍부한 콘텐츠를 살려보려고 했던 노력은 점점 수그러들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어느 지점인지를 보여주는 오피셜도 중요하지만...

남편의 모습을 통해  오피셜의 부작용도 상당함을 느낀다.


지금 내 분야에서 오피셜의 부작용은 무엇일까?
나는 어디서부터 달라져야 할까?

이제 새롭게 한 걸음 내딛는 내가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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