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가 챙겨 준 결혼기념일

by 이한나

16년 차 부부인 우리에게 결혼기념일은 '챙기기엔 살짝 귀찮고', '그냥 넘어가기엔 뭔가 신경 쓰이는 날'이다.

다행히도 2020년 결혼기념일은 함께 입원해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암묵적으로 '패스'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서운할까 싶어 나는 남편에게 "어제 퇴원해서 선물 살 힘이 없어. 우리 그냥 마음으로 기억하자!"라고 협약사항을 전달하였다.

남편은 그러기엔 너무 아쉽고 속상한듯한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22년 함께 한 나는 명확히 '생존을 위한 연기'임을 직감했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우린 말끝마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붙여댔다.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좀 맛있는 거 없을까?"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재밌는 영화 한 편 볼까?"

"그래도 결혼기념일인데 이렇게 넘어가긴 아쉽지 않아?"


그럼에도 기력 없는 우리는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기 대회를 하며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있었다.

때마침 내 핸드폰이 울려댄다.



앗... 부부만 기억하는 결혼기념일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남편의 누나이자 나의 형님은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며 10만원을 보냈다. (형님이 취업해서 나는 엄청난 득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멘트...


내가 내 남편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건데?

그게 고맙다는 형님.

항상 고맙다는 형님.


그 말이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한참 카톡을 바라봤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고맙고,

누군가 날 챙겨주면 당연히 고맙고, 날 기억해주면 당연히 고맙다고 할 것이다.

반면 지극히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상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들으니 내 마음은 몽글몽글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후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형님 보내줄까?'라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1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닌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문득 지난 일을 글로 쓰면서 내가 너무 감성적인가 싶었다. 드라마 탓인가?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당연한 것을 끄집어 내 그것에 대해 인사를 표하면 어떤 마음일지 궁금했던 나는 확인해보기로 했다. 나는 편하게 도전해 볼 수 있는 '딸'을 선택했고, 다민이가 우리와 함께 살며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딸아이는 평소 내가 분주하게 움직일 때면 "뭐 도와줘?"라는 말로 자신의 일거리를 찾는다.

아마도 손이 느린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이 밥을 빨리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혹은 우리 집안 최고 권력자를 받아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딸아이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나 또한 밥하고, 청소하고, 일하는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아이 입장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 내 마음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들을 끄집어 내 보니 오히려 짜증 내지 않고 엄마를 도와준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나긋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이야기했다.

"다민아... 귀찮을 수도 있는데 매번 엄마 심부름 기분 좋게 해 줘서 고마워."

그러나 딸아이는 나랑 다른 건지... 한 번 휙 쳐다보면서 "뭘~"이라는 한 글자로 말을 마친다.


뭐야? 그게 대답 끝이야?

나는 아이 마음이 궁금해 조금도 참지 않고 바로 물어봤다.

"다민아. 방금 엄마가 심부름 잘해줘서 고맙다고 하니 무슨 생각이 들었어?"

"아......... 그냥 엄마가 나 힘들게 낳아주고, 길러주고, 이렇게 힘들게 밥하는데... 나는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뭘... 내가 더 엄마한테 고맙지...."


아이도 나처럼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던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고마운 일이고, 그것을 표현하니 나도, 딸아이도 마음이 따뜻해진 것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천천히 생각해보니 감사함이 따라왔다.

'엄마 아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마워요.'

'여보 마스크 쓰고 사무실에서 힘들 텐데, 이렇게 버텨주고 돈 벌어줘서 고마워요.'

'다민아... 온라인 수업하면서 힘든데 그래도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참 자랑스럽다.'


이런 내 생각을 알았던 걸까?

저녁 밥상에 앉은 남편은 "힘들 텐데 밥 차려줘서 고마워."라는 말로 수저를 든다.

그 말 한마디가 너무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는다.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겠어? 오늘도 당연하다고 여긴 순간을 찾아서 또 감사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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