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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05. 2020

그놈의 '헛헛함' 타령...

"뭔가 헛헛하지 않아?!"

대체 뭐가 그리 헛헛한 것일까?

밥을 한 그릇씩 먹고도 늘 헛헛한 우리 가족은 식사 후 빵과 과자를 찾는 아주 나쁜 식습관을 지니고 있다.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냉장고를 하루에도 수백 번씩 열어젖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애초에 군것질거리가 없는 것이 상책이다.

음식을 적으로 여긴 것일까? 먹어서 물리치려는 서로의 습성을 알기에 마트에 가도 "과자 사지 마. 없으면 안 먹어. 있으면 먹으니까 아예 사지 마!"라는 말을 자주 건네곤 한다.


그러나... 마트 관계자는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거나 골라 15 봉지 9900원'

이미 우리 가족은 큰 비닐을 열어 '인당 5 봉지'를 외치며 먹고 싶은 대로 담아댄다.


그렇게 15 봉지를 확보한 그 날부터 남편과 딸아이는 밥만 먹으면 과자를 먹어댔다.

나 역시 과자를 좋아하지만, 나는 가족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엄마이기에 무거운 책임감으로 남편과 아이의 눈을 피해 과자를 몽땅 드레스룸 안쪽에 숨겨놨다.


이제 우리 집에 유행어는 '헛헛하다'에서 "과자 어디 숨겼어?"로 바뀌어 갔다.

밥만 먹으면 이곳저곳 다니며 과자를 찾아대는 남편과 딸아이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과자 어딨어? 한 개만... 진짜 조금만 먹을게."라는 말로 내 맘을 흔들었지만...

단호한 나는 "안돼! 그만 먹어. 이게 다 탄수화물 중독이야."라는 말로 식습관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하루 이틀이 어렵지, 며칠 안 먹으면 또 잠잠해진다.

그렇게 인내심을 발휘한 남편과 딸아이는 밥을 먹고 헛헛함을 달래는데 점차 익숙해졌다.

이제는 밥을 먹고도 헛헛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설거지를 하는 남편...

착한 남편은 나를 향해 스윗하게 말한다.

"오빠 설거지할 동안 씻던가~"


늘 가족들이 다 씻어야 씻는 남편이다.

딸과 내가 씻으며 어질러놓은 화장실을 깨끗이 정리하고, 바닥까지 솔로 문질러 닦는 100점 남편!!

매번 아무렇지 않게 먼저 씻었지만 그날따라 남편이 주는 배려에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목욕을 하면서 남편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바닥을 청소했고, 씻고 나오면서 바닥의 먼지를 쓰레기 비닐에 넣으려 했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비닐을 다시 보니...

꽁꽁 뭉친 과자 봉지가 내 눈에 띈다.

과자를 숨겨둔 곳을 가보니... 이미 과자는 많이 비어있었다.


허탈감... 평소보다 빨리 씻으라고 나를 재촉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동작이 느린 내가 천천히 씻는 동안 여유 부리며 과자를 꺼내 먹고 과자봉지를 뭉쳐서 버릴 모습이 떠오른다.

난 옷장 뒤에 과자를 숨겨놓고 얼마나 여유로웠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숨기는 놈' 위에 '몰래 찾아 먹는 놈'이 있었다.


뭔지 모를 씁쓸함을 느낄 때쯤.... 하늘은 내게 '나는 놈'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오래전부터 아버지 시계를 사드리고 싶었다.

몇 년 전 큰 맘먹고 아버지 시계를  사드렸으나 아버지는 백화점에 가 가격을 확인하고는 곧장 환불을 해버렸다. 늘 자식들이 돈 쓰는 것을 미안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나는 시계만큼은 아버지에게 꼭 사드리고 싶었다.


마음의 숙제를 이번 추석에 해결하고 싶었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시계를 고르고, 환불을 막기 위한 007 작전을 펼쳤다.(어차피 아버지와의 쇼핑은 불가능했다.)


나: 저기... 이 시계 말이에요. 내일 저희 아버지가 올 텐데... 특가 할인했다고, 진짜 싼 거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점원: 아 제가 내일 있긴 해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나: 그럼 여기 저희 어머니랑 아버지가 두 분이 오실 거예요. 꼭 좀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고,

막내딸이 큰돈을 썼을 거란 생각에 몹시 속상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곧장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예상한 사람처럼 어머니를 앞질러 시계 매장으로 질주했고, 자신의 시계를 내보이며 "혹시 이 상품과 똑같은 상품 좀 보여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빠르게 점원 언니에게 윙크를 해댔고, 점원 언니는 아주 능숙하게 이야기했다.

"아 네~ 이 상품은 어제 딱 하나 남은 거예요. 같은 상품은 없어요. 어제 엄청 좋은 가격에 사가셨어요. 이 제품만 본사에서 특별세일해서 10만 원에 판 거거든요."

그렇게 깜빡 속은 아버지는 시계줄을 줄였고, 시계를 찬 모습을 카톡으로 보내셨다.



하... 나는 '나는 놈'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뛰어댔지만... 결국 '나는 놈'인 딸에게 패배를 했다.


나는 매번 '뛰는 놈'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간혹 '나는 놈'이 될 때도 있었다.

살다가 '갑'이 되었다가도 순식간에 '을'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뛰는 놈'이 될 때도 있고 '나는 놈'이 될 때도 있는 것이 섭리인 듯하다.


아이가 어릴 적 나는 늘 아이에게 '나는 놈'이었다.

잠을 안 잘 때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으흐흐흐흐흐.... 잠 안 자면 잡아간다."라는 말로 아이를 위협했고... 깜빡 속은 아이는 잠자리에 고이 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뛰는 놈'이었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훌쩍 커... 엄마 아빠 위에 종종 '나는 놈'이 되곤 한다.

엄마 아빠의 행동을 계산해 전략적인 거짓말을 할 때도 있고,

나름 증거인멸을 시도하기도 한다.

"얘야... 엄마처럼 착한 일에 '나는 놈'이 돼야 되지 않겠니?"


'나는 놈'을 보며 너무 허탈감을 느끼지 말자.

'뛰는 놈' 밖에 안된다고 자책하지도 말자.

나도 한 때 누군가에게 '나는 놈'이었지 않는가!

가끔은 너도 '나는 놈'이 되어보라고, 모른 척하며 '뛰는 놈'이 되어주는 건 어떨까?

어차피 '뛰는 놈'과 '나는 놈' 사이를 오고 가며 살아가는 것이 삶인 거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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