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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Oct 26. 2020

먹고 싸고 청소하라!

나는 기업에서 강의를 하는 프리랜서 강사다.

2020년 초에는 교육 담당자들과 미팅을 하며 한 해의 강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났고... 나의 강의는 수차례의 연기 끝에 몽땅 취소되었다.

'이게 기회야.  집중해서 논문 쓰라는 하늘의 뜻인가 봐.'

쥐어짜는 정신승리와 함께 나는 2020년 8월 드디어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아도 내 삶은 달라지는 게 없다!'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지 않으면 남이 기대한다는 것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로나로 일이 취소되며 논문에 집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현재 일감이 없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역시 코로나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점차 내 머릿속에서 의심 분자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다른 강사들은 마스크 쓰고 강의하던데'

'줌강의(화상강의)도 많이들 하잖아.'

'나 강사생활 이제 끝난 건가?'


그런 생각이 자리 잡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새로운 변명을 생각해냈다.

"좀 쉬고 싶어. 나 강의하기가 싫어. 나도 남들이 말하는 논문 후유증을 겪는 중이야! 우울감도 있고...

허탈함도 크고... 나도 강의가 들어오긴 하지만 예전만큼 열정이 안 생기네... 그냥 쉴래. 나도 강의 가끔 들어온다고! 내가 쉬고 싶어서 쉬는 거야! 내가!"


그렇게 '맘 편히 쉬자'라고 마음먹고 여유를 부리려고 하면... 내 귀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직장인들은 쉬어야지 하면 쉴 수 있냐? 니 남편은 15년을 한 번도 안 쉬고 일했는데... 넌 쉬어도 된다는 건 대체 무슨 발상이야?'

늦잠을 자다가도 일할 남편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리 없는 남편은 산책할 때마다 깐죽거리는데 심취했다.

"집에 있으니까 좋아? 비록 돈은 오빠가 벌지만 네가 맘껏 써! 너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오빠만 눈치 보고 살면 되지. 둘 다 눈치 봐야겠니?? 괜찮아. 놀아~ 맘껏 놀아~ 우리 색시라도 편하게 살아. 오빠만 고생할게."라는 말로 내 속에 불을 질러댔다.

심지어 주식을 공부하라고 권유하던 남편은 "수익 내면 오빠가 월급 줄테니까 제대로 해보던가."라며  펀드매니저라는 새로운 직업을 선물하기도 했다.(물론 마이너스)


순간순간 찾아오는 내 마음의 두려움.

같이 논문 쓴 후배들은 그들이 바라던 모습대로 잘 되어가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온 것인지 알지 못한 채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내가 한없이 초라했다.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살림이라도 잘해보자며 집을 열심히 치워댄다.

퇴근한 남편을 향해 "여보... 나 살림 박사 할까 봐. 나 요리도 잘하지?"라며 히죽대는 나.

이른 아침 가족 모두가 떠나버린 집에서 강아지와 홀로 집에 남은 나는 초조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인지 북적거리는 주말을 유난히 기다렸나 보다.


그렇게 북적이는 주말이 돌아왔고 일요일 저녁이 되었다.

저녁 메뉴로 떡볶이를 선택한 우리는 지하 4층에 주차를 했다.

지하 4층에서 떡볶이집 지상 4층까지 어떻게 갈까?

평소 에스컬레이터를 타던 우리 가족이 어쩌다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주차를 하게 되었고, 집 앞 쇼핑몰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천천히 숫자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댄다.


나는 무조건 에스컬레이터가 좋다.

걸어 다니면서 운동도 되고, 이것저것 구경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기다리면서 속이 타들어갈 일이 없고 한층 한층 내 의지에 따라 빨리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는 4층에 내렸다.


떡볶이집에 입성한 나는 남편을 향해 조잘거린다.

"여보 엘리베이터 타도 금방 오네. 여기 에스컬레이터는 엄청 돌아가게 만들어서 많이 걷는데... 이것도 괜찮네..."

나의 수다는 메뉴판과 함께 종료되었고, 우리 모두 떡볶이를 먹는 것에 열중했다.

배가 슬슬 불러온 나는 다시 떠들고 싶었다.

"여보 여보~~~~ 내가 엄청난 걸 깨달았어.  내가 이렇게 먹고 놀면서도 늘 불안하고, 초조했어."

"니가?? 니가??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이 그렇게 잘 먹고 잘 자냐??"

너란 남자... 역시...


나는 섭섭한 표정으로 남편을 향해 속삭인다.

"그냥 좀 들어봐~~!!!!

난 말이야... 바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남들이 무언가를 할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어.

근데 오늘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깨달았어.

내 삶은 늘 에스컬레이터였다는 것을. 나는 에스컬레이터 계단이 움직이듯 늘 바삐 움직여야 된다고 믿었나 봐. 계단 올라가는 게 내 눈에 보여야 안심이 되고 그제서야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가끔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라도 탈 때는 '에스컬레이터로 가면 더 빠르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으로 발을 동동 굴리던 삶이 내 인생이었어.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래. 급할 때는 에스컬레이터도 타겠지만...

오늘처럼 엘리베이터 앞에 차를 주차하게 된 날에는, 혹은 다리가 아파 바쁘게 움직이기 싫을 때는 고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여보랑 수다도 재밌게 떨고, 핸드폰 검색도 하고... 그렇게 살 거야."


어머! 나 왜 이리 말을 잘해!!~~


나는 아주 천천히 오는 엘리베이터를 잠시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탈지도, 계단으로 뛰어갈지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엘리베이터 앞 벤치에 앉아 천천히 내 삶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집안 청소부터 강아지 산책 그리고 읽고 싶었던 책들도 잔뜩 읽으며...

천천히 나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계속 기다리다 엘리베이터 안 오면...  쌓아둔 힘으로 계단으로 가지 뭐!

지금은 잠시 이렇게 있을래!


여보! 여보는 돈을 벌어다 줘. 내가 함께 써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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