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년째 14층에서 살고 있다.
2년 정도 살 때쯤 15층 아줌마는 이사를 앞두고 내게 특별한 소식을 전해주셨다.
"우리 아들들이 뛰어서 정신없었죠? 새로 이사 오는 집은 어린 여자 아이가 있더라고요. 이제 덜 시끄러울 거예요. 그동안 너무 미안했어요."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나도 안 시끄러웠어요. 죄송하긴요. 진짜 괜찮았는데... 이사 잘하시고요~."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를 닮은 딸은 평소에도 둔하고 잠이 들었다 하면 업어가도 모를 만큼의 사람들이었기에 정말 괜찮았다.
딱 그때까지만...
새로 이사 온 가족은 정말 대박이었다.
일단 아침에 15층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집을 나서면 멍멍이가 짖어대기 시작한다.
이 개는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기본 30분을 베란다 앞에서 짖는다.
토가 나올 만큼 미칠 거 같은 순간에는 나 역시 베란다로 고개를 내밀고 "야! 이 개새*야!!!!! 조용해!!! 멍멍멍멍!!" 같이 짖어대기도 했다.
한참 논문을 쓸 때는 개를 죽이고 싶다는 잔인한 생각까지 했었다.
그렇게 꾹꾹 참고 참고 또 참고 또 참았다.
그런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15층 아줌마를 만나게 되었다.
"저기요. 개가 진짜 아침마다 베란다 앞에서 미친 듯이 짖어대요. 목소리도 엄청 크고요. 제가 녹음도 해 놨어요. 들려드릴까요? 개를 놔두고 갈 거면 베란다 문이라도 닫아 놓고 가셔야죠.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세요? 진짜 개념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댔다.
내가 나이를 먹으며 잃어버린 것 중 하나는... 용기였다.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긴 하늘은 기회를 주었다.
15층에 사는 꼬마 아이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것이다.
"안녕? 아줌마도 개를 키우는데... 너도 개를 키우지? 아줌마도 전에 본 적 있어. 참 예쁘더라... 근데 아침에 가족이 모두 나가면 혼자 외로운지 많이 짖는 거 알아?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아마 그 정도로 짖으면 개도 많이 힘들 거 같기도 하고... 베란다에서 짖다 보니... 아줌마도 너무 시끄럽고 힘들어... 엄마한테 꼭 말해줄 수 있니?"
그 이후로... 개 짖는 소리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15층 아이는 쑥쑥 자랐는지 발걸음 소리가 커지면서 새벽 한 시까지 뛰어다닐 때가 많았다.(아니 대부분...)
안방에 누워있으면 아이의 이동경로가 그려진다고 할까?
1년 넘게 쾅쾅쾅쾅 소리를 들으며 '참을 인'을 새기던 우리 가족들...
하지만 밤 12시가 될 때쯤이면 슬슬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다.
"대체 왜 안 자고 뛰어다니는 거야? 애를 안 재우고 뭐 하는 거야? 정말 미친 거 아냐???"
유난히 피곤한 월요일 밤 우리 부부는 '쾅쾅쾅쾅쿵쿵쿵쿵' 뛰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버렸다.
나는 미치도록 화가 났고, 남편 또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복수의 화신을 영접한 것인지 윗집에 보복을 결심한 그는 주먹을 들어 천장을 쳤는데.......
제길... 천장 석고까지 뚫어버렸다.
새하얀 가루가 바닥에 쏟아진다.
여전히 쿵쿵대는 소리에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나 올라가 볼까 봐."라는 말로 씩씩거리며 옷을 찾는 남편.
"올라가서 뭐할 건데? 지금 12시가 넘도록 뛰는 것도 문제지만, 12시 넘어 남의 집 두드리는 것도 똑같아. 윗집 아니면 어떡할 거야? 내일 관리실에 이야기해보자."
아이는 결국 뛰는 것을 멈췄고, 나도 남편도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 이사할 때 쓰고 남은 도배지를 찾았다.
딱풀을 열심히 발라 천장에 붙였지만... 내 눈에는 뚫린 곳만 보였다.
아이씨...
뛰는 건 윗집이다.
무례한 것도 비상식적인 것도 윗집이다.
그런데 층간 소음으로 날카로워지는 것은 우리 집이다.
잠이 들 때마다 쿵쾅 소리에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도 우리 집이다.
결국 쏟아지는 분노로 천장이 망가진 집도 우리 집이다.
어젯밤 구석구석 치우지 못한 석고가루를 닦아내며 결국 '성질낸 놈만 손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깨닫는다.
누군가 우리 집 안방 천장을 보면... 우리의 괴로움은 느끼지 못한 채...
"성질머리 하고는... 얼마나 성깔 더러우면 천장을 부쉬냐..."라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사람 미치도록 열 받게 한 놈은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묻어가고... 항상 날뛰는 놈만 눈에 띈다.
어릴 때 깐죽깐죽 놀리던 친구를 한 대라도 때리면... 친구를 때려서, 친구를 울려서 늘 나만 혼이 났다.
분노를 조절하는데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를 잘 내거나 욱하는 편에 속하지 않는다. 그 순간 부글부글 미칠 것 같아도 잘 참는다.
'지랄하면 나만 손해'라는 명확한 공식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기에... 결국 차분하게 지랄을 떤다.
그런데 어렵게 얻은 이 공식이 잘 적용이 안 되는 곳이 한 곳 있다.
바로 가족... 특히 나보다 어린 우리 딸...
좀만 기다리면... 좀만 참으면... 이성이라는 아이를 만날 수 있는데... 가슴에 불이 타듯 나를 미치게 만드는 분노가 내 정신줄을 쏵 뺏어버리고 '하악 하악' 입에서 불을 뿜는 용으로 변신시킨다.
불을 다 토할 때쯤이면 서서히 사람이 된다.
그때는 보통의 내가 아닌 '욱'이라는 큰 죄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있다.
아이의 잘못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나의 분노만 도드라져 '나쁜 엄마'가 돼버린다.
나는 왜 그럴까?
이중인격자인가?
아니면 '분노 총량의 법칙'이 있어서 밖에서 못한 양만큼 아이에게 쏟아내는 걸까?
또는 사회생활과는 다르게 가족으로부터 당장 피해볼 것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걸까?
혹은 좀 더 힘이 센 어른이라 약한 '을'에게 갑질을 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단 말인가!!!!!
점잖고 젠틀한 남편이 뚫어준 천장의 구멍을 통해 '가정에서의 나'를 보게 되었다.
바깥에서의 나의 모습은 새로 페인트칠을 한 아파트처럼 번지르르르 할지 몰라도...
가정에서의 나는 어쩌면... 여기저기 구멍을 내고 다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남들에게 성품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뭘 할까...
가장 가까운 가족은 날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벽지를 붙여도 팍팍 티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마음에 구멍을 내는 사람이 되지 않길 다짐해 본다.
***나는 윗 집에 건넬 편지를 쓰고 있다.
간식과 함께 줘야지!
남편! 한번 더 주먹 날리면... 그땐 가만 안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