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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Mar 04. 2020

4시에는 만날 수 없는 남자

남편의 진급 시기가 다가온다. 기준에라도 맞춰보고자 영어 점수라도 따려는 남편은 퇴근만 하면 매일 밤 오픽 시험 준비로 애를 쓰고 있다.

남편은 유튜브, 케이크(영어 어플), 오픽 예상 답변 등을 토대로 매일 밤 중얼중얼 거리며 암기를 한다.


어제는 너무 잘난 척하는 목소리로 영어를 따라 하는데 기가 막혔다.

한국어 발음도 이상한 남편은 영어 발음도 참 이상하다.

목에 가스가 찬 발음이라고 할까? 큰 개가 월월 짖는 상태로 하는 영어 발음 같다.

자존심 상할까 봐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참지 않고 "오빠 목에서 바람을 빼!! 완전 발음 이상하다고!"


남편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진짜?
진짜 그렇다고?
 나 방금 완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잘하지 않았어?


대체 뭘 잘한다는 걸까???


남편과 영어 에피소드는 정말 많다.

스페인에서 호텔 체크인을 할 때 "Where is the parking lot?(주차장 어디 있나요?)"

이 말을 남편은 3번은 했지만, 호텔 직원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당황스러워했다.

나라도 그럴듯하다.

'파-ㄹ킹랏'을 곧 죽어도 "빠킹랏", "빠킹랏", "빠킹랏"

어쩌면... FUCKING으로 들었던 건 아닐까?

딸아이가 구원투수로 '파ㄹ킹랏'이라고 말할 때, 직원은 웃으며 안내해줬다.

아... 정말 쪽팔렸다.

심지어 '체크아웃'을 '테이크 아웃'이라고 하질 않나....


어쨌든 남편의 영어 실력은... 쏘쏘인 거 같은데, 본인은 너무 잘한다고 믿고 있다.


특히 오늘은 정말 알 수 없는 모호한 발음의 '애포' '애포' '애포'를 반복하고 있다.


나는 너무 궁금했다. "애포가 뭐냐? 대체 애포가?"

남편은 다시 한번 목구멍에 가스를 집어넣더니

애포~ 애포~ 몰라?
 at 4!  4시에 만나자는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마루에서 책을 보던 아이는 방으로 들어오더니 "아빠 나를 따라 해 봐"

"애 ㅌ 뽀~ 오 ㄹ"

"애포"

수십 번을 따라 하며 남편은 아이에게

너랑 나랑 완전 똑같은데?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야?? 애포 맞잖아!!!

이런 답답한 아빠를 가르치면서 다행히도 아이는 절대 짜증을 내지 않는다.

늘 친절하게 수십 번이 되어도 "다시 해봐. 괜찮아."라며 상냥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지치지 않고 아이 달래듯 응원을 복돋아주던 아이는 아빠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아빠! 그냥 4시에 만나지 마. 꼭 4시에 만나려고 하지 마!
3시 55분이나 3시 59분에 만나자고 하면 되잖아.


나와 남편은 낄낄거리며 "굿 아이디어"라고 외쳤다.


아이의 재밌는 대안에 한참을 웃다 나를 생각했다.


나는 지난 학기 박사 논문 심사에서 처절한 패배를 겪었다.

심사위원분들은 나에게 완벽한 '애 ㅌ 뽀오 ㄹ', 'at 4' 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f', 'r' 발음을 흉내 내 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절대로 날을 샐 수 없는 체력의 나는 새벽까지 눈을 뜨며 노력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된다는 것을...

나는 결심했다. 4시에 만나지 않기로... 그리고 그 만남을 취소하는 걸로...


만나지 않기로 하면 편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약속을 취소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속 시원하고, 날아갈 듯해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분...


늘 고민하던 나에게 큰 언니는 이런 말을 했다.

"한나야! 언니가 애 낳을 때 허리 틀어서 낳았잖아. 진통이 너무 심해서... 참다 참다 정말 너무 아파서(참고로 고통에 강한 큰언니였다) 간호사랑 의사 붙잡고 제왕절개 해 달라고 부탁했어. 근데 의사가 뭐라는 줄 아니? "이미 수술할 때는 놓쳤고요. 그럴 때는 지나버렸어요. 견디고 낳아야 합니다." 그러더라.  그냥 낳아야 된다더라...  멈출 수 있는 것도 때가 있는 거 같아. 그때를 놓치면 그냥 해야 될 때도 있더라고."


'언제부터 이 여자가 이렇게 멋진 말을 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4시의 만남을 취소할 수 있는 때일까?'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

계속 불편하다면,

답답하다면,

화장실 다녀와서 안 닦은 기분이라면,

그리고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논문' 폴더를 다 지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4시의 만남에 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다.


다만 아이 말대로... 꼭 4시에 맞추려고 나를 죽이진 말자.

3시 55분, 3시 56분, 3시 57분, 3시 58분, 3시 59분....

나 대로 그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달려만 가보자...

너무 'at 4'가 되려 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


그리고 아이한테도 'at 4'하라고 쥐어박지 말아야겠다.

그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며,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응원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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