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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Dec 30. 2020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기는!

"지금 이한나 님 앞에 환자분 한 분 계시네요. 다음번이에요."

오는 순서대로 진료를 받는다는 말에 나는 아침 일찍부터 부리나케 달려와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5분

-10분

'뭐야? 방금 들어간 할머니 왜 안 나오는 거야?'

-15분

'뭐야?? 무슨 시술받으러 간 것도 아니고.... 너무 한 거 아니야?'

-20분

-23분

'와 진짜 어이없다....'

내 몸 안에 있는 짜증 세포가 미치도록 분열할 때쯤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한나 님 들어가세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이한나 님 안녕하세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언제 짜증 났냐는 듯 마스크 위로 눈웃음을 힘껏 지으며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나.

2020년 연기대상감이었다. 사실 내 마음은 '작은 병원도 아닌데 예약이 안된다고? 눈 뜨자마자 30분이나 운전을 하고 병원에 왔는데 또 25분을 기다리다니...  선생님! 오늘이 마지막입니다!!!'라고 외쳐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3분도 되지 않아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어머.... 이 선생님 왜 이리 친절해~~ 다음에 30분 더 일찍 와서 1번으로 진료받아야지!'라고 다짐을 했다.

선생님은 첫 진료라며 그동안 나의 생활 습관부터 증상까지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으셨고, 특히 내가 관심 있어하는 '똥'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 주셨다.

"선생님... 전 진짜 화장실을 많이 가요. 하루에 세 번씩 갈 때도 엄청 많아요. 물론 많이 먹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나의 연약한 장을 튼튼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플랜을 짜시고, 여전히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을 만큼 좋은 선생님.

다만... 음.... 다만....(선생님 죄송해요ㅠㅠ) 선생님과 대화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단어가 자꾸 생각이 안 나는지 고민하시다가... 영어로 표현하는 의사 선생님.

연기대상감인 나는 의사 선생님의 영어 표현을 들을 때마다 느긋한 표정으로  '오케이~ 아이 언더스탠~~'눈빛을 발사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님은 마치 통한다는 듯 더욱 편하게 영어 표현을 남발한다.


선생님은 아실까? 내가 진료실에서 나가자마자 '아까 그 단어 뭐였더라? 뭐라는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라며 고민한다는 것을...  

선생님은 아실까? 내가 진료실에서 나가자마자 '아까 무슨 단어냐고 물어볼 걸... 그냥 물어볼 걸...'이라며 후회한다는 것을...


점점 건강해진 나는 오랫동안 병원에 가지 않은 덕에 '영어와의 사투'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와인 판매대를 보며 불현듯 떠올랐다.


"안 달아요! 달아요! 설명 끝내준다!!! 저렇게 쉽게 쓰여있으니 완전 좋은데~!!"

나는 와인 설명에 감탄을 느끼며 '의사 선생님도 저렇게 쉽게 말해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좀 더 쉬웠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동시에  문득 의사 선생님 앞에서 실컷 이해하는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내 모습이 보였다.

'모르면 물어볼 것이지! 내가 안 물어봐놓고 왜 이제 와서 의사 선생님 탓???'


나의 '이해하는 척', '알아듣는 척', '아는 척' 등  '오만 척'은 병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놈의 '척'은 와인을 선물하기 위해 마트를 서성일 때도 나타난다.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평소 여행 가고 싶던 나라에서 만든 와인에 손을 뻗거나, 가격대를 감안해 와인을 고른다. 다행히 판매를 도와주시는 분이 있을 때면 '선물하기 좋은 와인', '부드러운 와인', '음식과 곁들이기 좋은 와인'등 설명을 듣기도 하지만.... 못 알아들을 때가 참 많다. 그럼에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에 내 고개는 어찌나 위아래로 움직여대는 모르겠다.

처음엔 '드라이한 와인'이란 이야기를 듣고 "아~네~ 드라이...."라며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와인 맛이 건조하다는 거야? 드라이한 게 모냐????'라는 궁금한 마음을 참아내느라 미칠 것만 같았다. 물론 검색으로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마는....


참 이상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아이에게는 꼭 물어보라고 하는데...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는 왜 질문하지 못할까?

병원에 가는 것도 알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와인 판매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 또한 알기 위해서인데...

왜 모르는 것 앞에서 물어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눈치가 빨라서 알아맞히는 스타일도 아니면서!

내 속마음이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모르는 거 들통나면 쪽팔리니까 안 물어보는 거잖아~~'라고...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니까~~'라면서...

'물어봤을 때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 기억 안 나? 그냥 끝나고 검색하는 게 낫잖아.'라면서...


딸아이 역시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질문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내가 수학 몰라서 묻는데 자꾸 애들이 그것도 모르냐고 놀려. 걔네들은 다 학원에서 배웠대. 그러니까 다 아나 봐. 그리고 수업 시간에 손들면 애들이 나 때문에 늦게 끝난대. 엄마~ 나는 궁금한 게 많은데 열개 모이면 물어봐야 된대. 너무 속상해!!!"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살던 시절이나 딸아이가 살고 있는 시절이나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


물론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서 질문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라고 묻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질문하는 것에 앞서 우리가 질문을 멈추게 된 이유를 돌아보고 싶다.

-'그걸 몰라?'

-'여러 번 설명했잖아.'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되냐?'

-'모르면 그냥 외워!'

-'생각 좀 하고 물어봐!'

-'머리는 폼으로 있니?'

우리가 질문했을 때 다시 돌려받은 이야기와 한심한 눈빛.


현재 딸아이는 학교에서 '질문왕'이 되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질문하는 것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고, 질문하는 학생들에게 수업 태도 점수에 반영하고 있다. 아이가 온라인 수업이 끝나도 한참을 방에서 나오지 않을 때면 이유는 한 가지다.

"엄마. 아까 궁금한 게 많았는데 선생님 설명이 이어져서 수업 끝나고 물어보느라 늦었어. 나 말고도 궁금한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쉬는 시간이 없네."


유대인이 노벨상을 25% 가까이 차지하는 이유가 질문하고 토론하는 '하브르타' 수업과 당돌하고 뻔뻔하게 묻는 '후츠파'정신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딸아이가 노벨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질문왕이 되었으면 한다.

'너무 좋은 질문이야!'

'궁금한 게 있는 걸 물어봐줘서 고마워! 같이 찾아볼까?'라고 말하는 엄마 덕분에 말이다.


-질문해서 난감해졌던 기억들.

-질문해서 혼났던 기억들.

-질문해서 눈치 없다고 욕먹었던 기억들.


다음 세대에는 다시는 그런 기억들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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