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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Dec 29. 2020

내 인생의 흑역사

그저 카톡으로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내 기분이 나빠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지 모를 불편함.

'내가 예민한 걸까?' vs '상대가 이상한 걸까?'


확실한 아군이 필요했다.

나는 절대적으로 나의 편이 되어줄 친구에게 이 카톡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친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친한 선배한테 일을 받았어. 대학교 강의인데 코로나 때문에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학생들이 인터넷으로 보는 거래. 근데 내가 강의할 교안에서 출처를 빼먹은 거야. 그래서 잘 고치기는 했는데... 암튼 나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야. 네가 볼 땐 어때? 내가 이상한 거니?"


중학교 때부터 같이 놀았던 친구이기에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안 들어도 훤하다.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어머~ 야~~ 기분 나쁘겠네~~ 이한나~~~ 맘 상했어?"라고 말해줄 친구.

그랬기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전화를 걸게 만드는 나의 친구.

아군으로 소속된 친구의 말을 천천히 기다려본다.


"(...) 점이 좀 많네. 카톡 보니까 나름 조심히 얘기한 거 같은데... 이래서 애매할 땐 차라리 통화하는 게 낫다니까."


어랏... 기다렸던 대답이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나의 아군이 아니었지만 늘 나의 편이 되어주는 친구임을 알기에 친구에 말에 귀를 기울여본다.

'정말 (...)이 많아서 그런가?'

그래서인지 '상대가 이상한 걸까?'에서 '내가 예민한 걸까?'로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던 불편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묻히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카톡을 정리하면서 다시 선배와의 카톡을 보게 되었다.

나에게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뭐가 그렇게 불편했다는 거야? 이제 보니 별거 아니네... 친구 말이 맞았네. 그냥 점이 많을 뿐 별 거 없네. 아무렇지도 않구만... 그때 왜 그렇게 까칠하게 굴었지? 대체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선배의 카톡에 왜 그리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걸까?

나는 수첩을 들어 그 당시 상황을 떠올려봤다.


선배는 내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인관계'에 대한 강의를 의뢰했다. 비록 30분의 강의지만 3년이나 학생들에게 재생된다고 하니 나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1-2년 전에 사진만 봐도 촌스러운데 3년이라니!!!!

3년이 지나도 영상 속 나의 모습이 후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머리 스타일을 만들지, 어떤 화장을 할지 무려 2주간을 고민했다.


정답은 하나였다.

'내 손으로 하지 않는 것! 전문가의 손길을 빌려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고 촬영하는 것!'

'얼마나 예뻐질까?'


"예뻐져라 예뻐져라!! 하나 둘 셋!"

1단계: 헤어 완성

'뭐지?.... 이건 아닌데.....'

"저기... 머리가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영상 촬영하는데... 머리가 너무 이상해요. 다시 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시 한들 뾰족한 수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급하게 다른 미용실에 전화해 머리를 감고 새롭게 디자인을 시도했으나... 그 날은 뭘 해도 안 되는 날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 앉을 내가 아니었다!

비록 머리와 화장은 폭망이지만 강의력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굳센 다짐을 갖고 '절대 파이팅'을 외쳐댔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평소 뇌 속에 전자시계가 달린 사람처럼 시간을 칼같이 계산하고 맞추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은 강의에 기본인 시간관리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망해도 너무 망해버렸다.

소원을 들어주는 '모래요정 바람돌이'가 내게 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주선을 태워달라고, 공주가 되고 싶다는 소원보다는... 나는 하루만, 딱 하루만 돌려줄 것을 부탁할 것이다.

"제발 내 흑역사 좀 지워줄래??"

EBS 모래요정 바람돌이 25화 중

나에게 소원을 들어줄 '바람돌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학교 측과 합의해 재촬영을 요청했다.

재촬영을 하면 나의 끔찍한 모습은 재생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리셋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기쁨의 순간에... 이상하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흑역사', '최악', '폭망'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스스로를 향한 실망감이 내 마음 한편에 떡하니 자리 잡고는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나를 향해 '괜찮아. 다시 찍으면 돼. 그땐 평소처럼 내가 머리하고 화장하면 돼. 강의 내용은 좀 줄이지 뭐!'라며 나를 달래고 또 달래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망할 놈의 또렷한 기억력!)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자책하고 또 자책할 때쯤  선배는 내게 '출처를 빼먹지 말아 달라'는 공손한 요청을 한 것이다. 담당자로서 당연했던 말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내 귀에는 '야~~ 머리 똑바로 하고, 강의 제대로 안 해!'라는 속삭임이 같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마치 몰래 숨겨놓은 것을 들킨 사람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민망함이 내 안에서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평소와 같지 않았던 것을...


오래전 책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쓰인 글이 떠올랐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중략)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품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은 평소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 순간의 나의 상태, 나의 감정, 나의 생각이 그 상황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억해본다.

모든 것이 나에게로부터 나오는 거구나.

마음이 불편해질 때면...

아군을 만들기 전 나를 돌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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