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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Dec 11. 2020

내 생일만 기억 못 하는 엄마 아빠

"아빠 어쩜 그럴 수가 있어? 이제 나한테 심부름시키지 마! 진짜 안 해줄 거야.

맨날 다른 사람들 생일 때마다 나한테 전화해서 커피 쿠폰 좀 보내라고 시키고, 케이크 보내라고 시키더니 왜 내 생일만 잊는 거야? 가족도 아닌 다른 사람들 음력 생일까지 챙기면서 정작 막내딸 양력 생일은 왜 매번 잊는데~ 진짜 너무해!!!!"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빠~~ 아빠~~~~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우리 딸............"


아빠의 목소리 뒤로 사그락 사그락 달력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휴... 우리 딸... 미안해... 끊을게."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작 생일날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였는데... 아빠와 통화를 너무 길게 한 것이 탈이었나 보다.

20분 가까이 이어지는 수다에 불쑥 내 안에 구겨 넣어둔 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이제 곧 내 전화기는 '엄마'라는 글자와 함께 진동이 올 것이다. 역시나였다.


'드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드드' 진동소리가 난다.


"여보세요~ 엄마 왜?"

"아니... 그냥... 우리 딸 밥 먹었어? 엄마가 우리 딸 육개장 끓여줄까 해서 전화했어. 요리하면서 생각해보니까 어제가 우리 딸 생일이었더라."

"치... 아빠가 말했겠지 모~"

"엄마가 요즘 정신이 없어. 아까도 TV 리모컨을 어디다 둔지 몰라서 한참을 찾았어. 엄마가 요즘 그래. 정신이 하나도 없어."

"엄마! 엄마는 젊을 때도 그랬어. 매번 냉동실에 전화기 넣어놓고, 금 뭉치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랬잖아. 그건 원래 그랬던 거야! 그리고 기억력이라면 끝내주는 사람이 왜 이래~ 내가 만원 빌려간 것도 잊어버리지도 않고 받아내면서~ 기억력이 나보다 좋으면서 무슨~!!!!"


엄마는 나의 말 공격에 처절하게 패배한 듯 보였다. 그러나 쉽게 물러설 엄마는 아니다. 엄마는 나를 설득시키겠다는 각오로 노선을 변경했다. 같은 여자로서 출산의 고통을 들먹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엄마가 왜 잊겠니. 추운 겨울에 너 낳기 전날 엄마가 김장했잖아. 막달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렇게 김장을 하고 나니까 다리가 힘이 없고 벌어지는 느낌이 들더라. 너도 알지? 얼마나 힘든지..."

"알지."

"엄마가 너 낳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니가 엄마를 축하해줘야 되는 거 아니니?"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귀여운 우리 엄마!

하지만 나는 엄마의 가여운 출산 스토리에 공감하지 않기로 작정한 터였다.

"으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제부터 엄마 생일에도 만나지 말아야겠네. 엄마 낳느라 고생한 할머니 기리러 가야지~ 할머니가 엄마 낳느라 얼마나 고생했겠어! 이제 내년부터 엄마 생일에는 이천호국원으로 가자! 거기에 할머니 모셨잖아. 알았지?"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내 생일을 지나며 떠오르는 학생이 있었다.

내 수업을 듣고 있는 성실하고 적극적인 학생 '주영이'.

"주영아~ 한 주동안 잘 지냈지?"

"네~ 교수님... 근데요... 저 오늘 아침에 너무 속상했어요. 저요~ 다이어트해서 저녁밥도 안 먹거든요. 점심도 밖에서 먹고... 집에서는 딱 아침만 먹는데... 저희 엄마는 절대 밥을 안 차려주세요. 어릴 때부터 맞벌이하셔서 제가 밥해먹고 다니긴 했는데... 이제 집에 계셔도 아빠만 차려주지 저는 늘 김치랑 김만 꺼내 주세요. 제가 사진 보여드릴까요? 제가 아침에 너무 상처 받아서 사진 찍어놨다니까요."

주영이가 보내 준 밥상 사진


주영이는 글썽거리는 눈빛으로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풀어냈다.

"진수성찬이 뭔지 아세요? 전날 아빠가 먹다 남은 생선이라도 있으면 진수성찬이라니까요! 남은 국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요. 정말 딱 김치랑 김이에요. 물론 제가 성인이고 엄마가 꼭 밥 차려줘야 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만... 가끔은 너무 울컥하고 서러워지는 거 있죠! 근데요 제가 서운해하는 게 이상한 거예요?"


주영이에게 미안하지만... 그때는 그토록 서운할 일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아직 많이 어리네'라는 생각을 하며 "주영아. 나는 딸내미 아침밥 안 줘~ 두유랑 떡만 줘. 밥 주는 게 어디야~~~"라는 망언을 해버렸다.

'미안해 주영아...'


내가 서운했던 것처럼 주영이도 서운했다.

매일 먹던 김치와 김을 먹다가...

매년 그냥 지나가던 생일이었는데 통화를 하다가...

평소 아무렇지 않다고 느꼈던 일상에 소리도 없이 찾아온 서운함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메워버렸다.


난 아직도 엄마 아빠의 어린 딸이었나 보다.

여기저기 아파 잠도 못 주무시는 나이 든 엄마 아빠를 챙겨야 하는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누리고 싶었던 막내딸이었다.

"생일 축하해"라는 따뜻한 한마디로

"뭐 먹고 싶니?"라며 준비한 따뜻한 밥 한 끼로...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

가끔 강의 현장에서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주영이를 대할 때처럼 '저렇게 나이 먹어도 저런 생각이 드는 걸까?'라고 의아해했던 나였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들도 가끔은 엄마의 사랑을, 아빠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고 싶던 어린아이였음을...

배우자의 사랑이 아닌. 다른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아닌...

엄마 아빠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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