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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Jan 02. 2021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

그저 서랍장을 열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뿐인데 내 입에선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허리야... 이번 달 생리통은 왜 이렇게 허리가 아프지?"

허리가 갑자기 아팠던 것은 아니고 오늘 아침부터 아팠던 건데 내 옆에 누군가 있으니 나도 모르게 '아이고 타령'이 새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선 남편이 귤을 까먹고 있다.

남편은 귤이 맛있는지 내게 "오~ 완전 달아~먹어봐."라며 열심히 귤을 깐다.


'내가 분명히 허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귤을 먹어보라고?'

영화에서 들었던 멘트처럼 '자궁에 뇌가 달린 사람'마냥 오늘의 날카로운 신경은 최고조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서운함을 담아 선제공격을 시도한다.

"여보~ 내가 허리가 아프다잖아. 보통 아프다고 하면 '많이 아파? 괜찮아?' 이렇게 말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귤이나 먹으라고 하고!! 여보는 진짜 공감능력이 제로라니까~~!!! 제로!!!"


귤로 비타민 충전을 완료한 남편은 재빨리 나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사적으로 말을 뱉어냈다.

"야~ 니가 똥 마려할 때마다 내가 공감해야 돼? 어머 우리 색시 또 똥 마려? 아~ 똥이 마려웠구나~ 이러면서 공감해야 돼?"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황당한 표정으로 "지금 똥 마려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내가 허리가 아프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며 논리를 내세웠다.

남편은 빙긋이 웃으며 준비한 따발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아~ 허리 아파! 이런 말은 아~ 똥 마려 같은 말이야. 갑자기 무슨 일로 아픈 것도 아니고 매달 생리통으로 아픈 거잖아. 매번 끼니때마다 '아 배고파', 잠잘 때마다 '아 졸려', 아침마다 '회사 가기 싫어' 이런 반복적인 이야기 같은 거니까. 그런 말에 하나하나 다 어떻게 대꾸해?"

남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나의 레이저 광선 눈빛을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었고, 살 길을 찾아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아니다. 오빠가 잘못 생각했다. 색시가 똥 마렵다고 하면 '아~그래 똥 마려워?' 이렇게 해야 되지. 허리가 아프면 '아~ 허리가 아파?' 이렇게 해야 되는데... 오빠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미안해~ 이제부터 공감하는 남편 될게."


그때부터 남편의 지독하고 끈질긴 공감이 시작되었다.

"아이고 깜짝이야!"

"아~ 그랬구나! 우리 색시가 놀랐구나."

"맛있네~!"

"아~ 그랬구나! 우리 색시가 맛있구나 오빠가 또 사 올까?"

"등이 가려워~"

"아~ 그랬구나! 우리 색시 등이 가려웠구나"

"배불러!"

"아~ 그랬구나! 우리 색시가 많이 먹었구나"


나는 가슴속부터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그만 좀 해!!! 진짜 짜증 나!!!! 이런 건 짜증나게 하는 거야! 공감이 아니라고!"

내 짜증에 멈쳐줄 남편은 아니었다. 남편은 쫓아다니며 "아~ 그랬구나! 우리 색시가 짜증이 났구나"라며 끝도 없이 깐죽 되더니 마침내 내 귀에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공감을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이란 말을 속삭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오! 얄미워!


'그래... 나 오늘 정말 지랄쟁이네. 내가 오늘 첫째 날이라 센치하긴 한가보다. 여보야 미안해~~~'라는 마음으로 차분해질 때쯤... 어렸을 적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도 지랄 안 해도 지랄'이란 말을 좀 더 순화해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고'란 말로 바꿔보겠다.)

이놈의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고' 모습은 어려서부터 자주 봐왔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저녁밥을 먹은 뒤 아빠가 설거지를 할 때면 어머니는 조용히 아버지 뒤로 와 똑같은 단어를 정확히 세 번 외쳐댔다.

"물! 물! 물! 물 좀 안 튀고 설거지하면 안 돼? 아주 사방팔방에 다 튀었잖아!"

아빠는 엄마의 잔소리에 인이 배긴 사람처럼 그저 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 설거지를 마쳤다.

그렇게 매일 밤이면 아빠는 설거지를 하고, 엄마는 잔소리를 이어갔다.

그런 아빠에게 때때로 행운의 여신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어쩌다 저녁 시간이 늦어져 엄마가 시청하는 '저녁 드라마 시간'과 아빠의 '설거지 시간'이 겹칠 때 획득할 수 있는 '잔소리 면제권'이었다. 말없이 찾아온 잔소리 프리데이를 누리던 어느 날 엄마는 브라운관 속에 설거지를 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에 열광을 했다.


젊고 탱탱한 남자는 앞치마를 메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뭐가 좋았던 것인지 "아이고~ 요즘 남자들은 저렇게 잘한다니까~ 저 남자 좀 봐라!"며 나에게 TV 속 남자를 가리켜댔다.

저쪽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늙은 남자는 안 보이는지 엄마는 TV 속 젊은 남자를 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빠는 평소처럼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늙고 멋없는 남자의 뒷모습이 왜 그리 쓸쓸해 보였는지 나는 아빠의 서재로 따라 들어갔다..

평소 말 수가 많지 않던 아빠가 나를 보자마자 "너희 엄마 참 그래. 아까 내가 못 들었을 거 같지? 내가 다 들었어! 매일 나도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TV 속에 있는 남자 칭찬하는 거 들었지? 에이 그러는 거 아니다~내가 설거지하면 물 튄다고 잔소리만 하지 고맙다고 말하기를 하나?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 거 이제 안할란다."라는 말로 가슴속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셨다.


나는 아빠의 낯선 모습에 잠시 멍하니 아빠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했던 아빠도 서운함을 느끼는구나'라며 놀란 마음으로...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고'의 다수 경험자인 아빠는 그럭저럭 잘 견뎌왔으나... 자신과 똑같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 TV 속 다른 사내가 자신의 아내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모습에 마음이 상한 것이 분명했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보니 아빠의 마음을 정확히 알 것만 같다.

때론 '사랑해'라는 말 외에도 우리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들이 있음을...


어떠한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의 칭찬 한마디에 더없이 행복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한마디가 좋아 다음날까지 미소 지어질 때도 많다는 것을...


-힘들게 일하고 퇴근할 남편을 위해 저녁밥을 짓고 있을 때 남편은 내게 다가와 "여보~ 나 줄려고 이거 하는 거야? 너무 고마워. 여보 집안일 힘들었지?"라며 건네는 그 한마디.

-시댁에 다녀오는 길에 "멀어서 힘들지? 그래도 먼저 가자고 말해줘서 고마워."라는 그 한마디.


어떻게 보면 집에 있는 사람이 밥을 차리는 것이 맞는 일이고, 한동안 못 뵌 시부모님을 찾아뵙자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에 대한 '칭찬과 인정'의 한마디가 졸릴 때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내게 새 힘을 '후~'하고 불어넣어준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배우자의 칭찬 한 번으로 두 달은 잘 지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서재로 들어갔던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고자 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했던 그 얼굴...

그 모습을 기억하며 나는 '찾아가는 칭찬 서비스'를 하려 한다.



"여보~~~ 내가 아까 공감 제로라고 해서 미안해. 아까 나한테 공감해주려고 노력한 거지? 나 오늘 배 아픈 날이라 좀 까칠했나 봐. 그래도 공감해준 거 고마워~ 조금 깐죽거린 거 같긴 하지만 ㅋㅋㅋ 그래도 생각해보니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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