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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대학교병원 Mar 07. 2022

보스턴 고사리를 아시나요?

천정은 서울대학교병원 영상의학과 소아영상의학 분과장

사진 박태희 사진가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불현듯 사진에 빠져들어 미국으로 사진 공부하러 떠났다. 프랫예술대학에서 필립 퍼키스에게 사진을 배우고 그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진강의노트』를 번역했고 안목출판사를 설립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 매체를 연결하는 콜라보레이션 작업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으며 그 첫 번째 결과물로 사막의 꽃을 만들었다. 현재 사진 작업과 생계의 조화를 위해 부산에서 안목 갤러리 북카페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교수실을 옮기면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오래된 책들과 종이 쪼가리들을 정리했다. 언젠가 찾아볼 수도 있다는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복사한 논문들과 먼지 가득한 파일들을 내치고, 기르고 있던 공기정화식물 몇 개만 챙겼다. 예전의 나는 물건을 잘못 버리는 성격이었다. 왠지 언젠가는 한번 쓸 것 같은 것, 소중한 기억이 될 만한 것들은 꼭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물론 아직도 비우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도 고등학교 졸업식 때 입었던 벨벳 정장이 옷장 안에 있는데 1년에 한 번 정도는 만지작거리며 버릴까 말까를 고민 중이다. 그러고 보니, 웨딩드레스도 침대 밑 수납공간 어딘가에 25년째 잘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끌어안고 함께 가려던 마음을 비우기 시작한 것은 아마 10여 년 전부터였던 것 같다. 가정의학과 교수님의 진료실이었는데, 왜 갔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천 선생, 너무 지쳤군요. 쉬엄쉬엄하세요. 이러면 번아웃 될 수 있어요"라는 조언에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즈음이 참 힘들기는 했던 것 같다. 성실함, 꾸준함, 그리고 시작하면 끝은 본다는 근성으로 학생 시절부터 교수가 될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내왔었다. '스마트하지는 못해 도맡은 일은 잘한다'라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평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많은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 태엽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느낌이었고,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에 보스턴 고사리를 입양했다. 보스턴 고사리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뻗치며 자라는 풍성한 잎사귀가 매력적인 실내 공기정화식물이다. 길이도 제 각각인 잎사귀들이 제멋대로 뻗어가는 모양새가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여인의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들면서 재잘거리는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 같기도 해서 끌렸다. 요즘 같은 겨울철엔 건조한 공기 때문에 잎이 말라 색깔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낙엽처럼 잎사귀가 자주 떨어지기도 하지만, 사계절 내내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뽐내는 친구이다. 얼마 전엔 분갈이를 한답시고 과감하게 뿌리 절단술(?을 집도하는 바람에 시들시들해진 보스턴 고사리를 살리느라 여간 마음을 쓴 게 아니다. 


매일 아침 교수실 문을 열 때마다 "안녕"하고 인사할 수 있는 반려 식물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일하다가 지치거나 피곤할 때면 분무기를 들고 이 녀석에게 다가가 신나게 물을 뿌려준다. 잎사귀 위로 동글동글 물방울이 맺히면 이내 탱글탱글해진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모양이 사랑스럽다. 이렇게, 작은 것들에 기뻐하는 일들이 반복되니 지쳤던 마음의 피로도 어느새 많이 줄어들었다. '할 수 있어'라며 나 자신을 몰아세우기보다는 '잘했어'라고 나 자신을 칭찬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까지는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으니, 지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남들보다 앞서 나가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내게 맞는 속도로 걸어가 보려고 한다. 


얼마 전 서울시청사 앞에 크게 걸려있던 글귀가 생각난다. 

'떨어진 게 아니라 내려놓은 거예요. 그게 인생이에요. 낙엽이 씀.' 

낙엽이는 내려놓을 시기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천정은 서울대학교병원 영상의학과 소아영상의학분과장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아 악기연주, 운동 등을 즐겼고 아이들을 좋아해 유치원 선생님이 되기를 희망한 적도 있었다. 2019년부터 2년 간 서울대학교병원 대외협력실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영상의학과 소아영상의학분과장이자 대한초음파의학회 학술이사, 국제학술지 『Ultrasonography』의 부편집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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