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 임선아 photo. 황필주(Studio79)
박현주 작가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집요하게 빛을 탐구하고 또 이를 작품으로 구현했다. 빛은 어둠, 소멸과 대조되는 것으로써 강한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한다. 그는 작품 속의 ‘빛’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따뜻한 기운과 삶의 위안을 얻길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본인의 작품 3점을 기증했다.
박현주 작가가 지난 7월 14일부터 약 3주간 ‘빛 속으로 ’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평면 회화 작품들을 새롭게 선보였다. 그간 꾸준히 반 입체 형태의 작품을 선보였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이번 신작들은 새로운 시도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 입체 작업을 해오면서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찾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게 되면서 텃밭을 가꾸고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죠. 땅을 고르고 씨를 심고 가꾸어 열매를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이, 제가 하는 바탕지 작업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어로 ‘ground’는 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탕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이번 평면 회화 연작의 바탕 작업은 생 아사천 면에 아교로 초벌 칠을 하고, 중탕한 토끼 아교 용액과 탄산칼슘, 티타늄 화이트로 만든 젯소 용액을 섞어 재차 칠을 하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는 물감의 번짐과 은은한 발색을 표현하려면 바탕 작업에 공을 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탐스러운 열매를 얻기 위해서 성실히 땅을 일궈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현주 작가는 이렇듯 땅을 일구는 마음에서 영감을 얻고 또 이를 작업 과정에 투영하여 변화와 시도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작업의 완성은 보이는 결과물일 뿐만 아니라 완성에 이르는 여정까지를 아우르는 듯하다.
박현주 작가에게 있어 이토록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작업 과정 자체가 때론 삶을 성찰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번 빛 그림 연작의 작업 중에는 바탕지에 물감이 스며들게 하여 번지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연히 물감의 흔적들을 얻었어요. 예전에는 의도하지 않은 부분은 애써 지워내려고 했는데, 언젠가부터 우연의 흔적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작업 방식의 변화는 저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INTO Light> 전시 소개 내용 중에는 ‘시간의 흔적들이 쌓여 만들어진 빛’이란 표현이 있다. 시간의 흔적이란 알게 모르게 쌓여가는 나의 이야기와 경험일 것이다. 우리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유기체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삶의 이야기가 누적되어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인 기억과 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끊임 없이 영향을 미치곤 한다. 박현주 작가의 시선에서 빚어진 ‘빛’의 한 형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시간의 경험 속에서 다듬어지고 성숙하여 비로소 완성된 것이라고 말이다.
박현주 작가에게 작업은 거를 수 없는 것이지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기도 하다. 오히려 작품-작가의 시간을 벗어나 세상에 작품을 내보이는 것이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일이다. 그의 품을 떠난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교감하기에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기도 하다.
“전시 기간 중에는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분들이 제가 미처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서 반응을 하시거나, 같은 작품이더라도 각자 다른 시선에서 작품을 보시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저에겐 몹시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이죠.”
서울대학교병원에 3점의 작품을 기증하게 된 계기 또한,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겪고 있던 지인이 매일 아침 침실에 걸려있던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우울증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건넨 덕분이다. 지인의 이야기에 박현주 작가는 서울대학교병원 대한외래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작품 기증까지 결심했다. ‘빛’을 담아낸 자신의 작품이 힘든 시간을 겪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박현주 작가는 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 지친 삶에 위안을 얻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일상 너머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통로를 열어주는 사람이 작가이고요. 화가로서 제가 할 몫이 바로 이런 것들이겠죠.”
빛 한 점 볼 수 없어도 기꺼이 어두운 밤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때가 되면 아침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어 아직 보이지 않을 뿐 우린 빛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 너머의 세상과 연결되었을 때 우리는 아직 눈 앞에 드러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다. 박현주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예술로부터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