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영 생태철학자
21세기가 시작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시절, 어느 영미권 국가에서, 그 사회에 완전히 귀속되지는 않은 ‘사회 안의 외방인’으로서 지내며 실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원하는 삶이 어슷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남유럽에서 왔든, 남미에서 왔든, 중국에서 왔든, 그들이 소망하는 삶은, 내가 보기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움직이지 않는 사실은 이곳 한국에서도 적용된다. 지하철 3호선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경제적 처지도, 사회적 지위도, 직업도, 취향도 제각각이지만, 소망하는 삶은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의 친교(우정 또는 가정), 건강, 욕망과 꿈의 성취, 정신적 안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어느 정도의 부(富). 그러나 우리에게 공통된 것은 이것 만이 아니다. 또 하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토록 건강을 원하면서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 그토록 정신적 안식과 휴식을 원하면서도 안식하고 휴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건강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휴식하기이다. 보통 ‘건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아침방송에 나오는 ‘건강한 노인’ 가운데 과연 얼마가 휴식하는 법을 알고 있을까?
휴식은 결코 단순한 주제가 아니다. 불가(佛家)에서는 휴식을 휴헐(休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휴헐은 곧 탈속, 정각(正覺), 해탈이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함축한다. 사실, 휴식의 실천이 어려운 것은 그것의 본질이 '놓아 버림(Letting go)'이기 때문이다. 숙면하는 사람은 비수면 시간을 잘 놓아 버리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을 놓아 버리면 생각을 쉬고, 욕망을 놓아 버리면 욕망을 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꼭 이루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놓아 버리면 참으로 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세속살이를 하는 개인에게는 분명 딜레마다. 놓아 버리면 쉴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되면 삶의 성취도나 만족도는 떨어지고 말 테니 말이다.
어떻게 이 딜레마를 풀 수 있을까? 로마인들의 경구 그대로, 나는 이 문제도 '걸으면 해결된다(Sovitur Ambulando)’라고 생각한다. 걸을 때, 우리는 과중한 일상에서 벗어나 일종의 휴식에 들어간다고 봐도 좋을까? 그러나 이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걷기는 ‘휴식’이라기보다는 휴식으로 향하는 이행(移行)에가깝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잠시 떠올려보자. 바닷물에 들어간다고 곧바로 수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육지에 서 일어나는 삶의 모드를 벗어버렸다는 점에서, 수영을 향한 이행이다. 마찬가지로, 걷기를 목적 삼아 걸을 때, 늪에 빠지듯 걷는 즐거움 속으로 빠질 때, 우리는 완연히 (일상에서, 일상적 고민에서, 일상적 소망과 욕망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벗어 남은 아니다. 걷기라는 놀라운 활동을 하며 사실 우리는 일상을 관장했던 자아와 ‘거리두기’를 하게 된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 평소의 소망과 욕망을 스스로 조망하고 조율한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만으로 도산의 정상을 등반한 것과 같은 효과에 얼추 다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결코 사변적인 것만은 아니다. 1998년 미국의 뇌과학자인 마커스 라이클(Marcus Raichle)은 멍한 상태이거나 몽상에 빠졌을 때 활발해지는 뇌의 영역 즉,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을 발견했다. 이 영역은 생각나는 대로 생각을 따라갈 때, 몽상할 때, 잠을 잘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등 특정한 상황에서 활성화된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상황이 있다. 그것은 자신에 관해 생각할 때이다. 독일의 과학자이자 인문과학 전문기자인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에 따르면, 자신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 뇌는 정체성을 가꾸고 자존감의 초석을 다진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 두며 참된 자신(되고 싶은 자신)과 사귀는 산책 시간, 무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는 걷는 시간이야 말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시간이 아닐까. 40년이 넘도록 성당 안으로 들어가듯 길에 올랐던 나로서는, 확실히 그러하다는 신념이 있다. 걸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일상에서 매몰되었던 우리 자신을 구출해낸다. 먼 곳을 바라보는 여유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우리에게 휴식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인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팽창 자본주의의 근저에는 팽창의 멈춤을 꺼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자부심과 얽혀있는 소유욕과 과시욕이 자리 잡고 있다. 때로 나는 한국인이 ‘소박함을 잃고 만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고속, 고층, 하이테크, 부(富)를 강남의 중심성을 성찰 대상으로 삼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이렇듯 당연시되던 것 마저 성찰하는 힘이 우리 안에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날 수 있을까?
적어도 각자의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 그 힘은 걷기를 통해 소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발효된 걷기는 우리의 삶에 중심을 잡아 준다. 필수적인 것과 여분의 것을, 긴요한 것과 긴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케 해주고, 후자를 놓아 버리게 해 준다. 소박함의 미덕을 배우는 산책의 시간은 그 미덕을 미처 몰랐던 사람에게도 가능하다. 산책로에서 우리는 자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현시하는 소박함의 풍요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소박함으로 향한 길, 그리하여 휴식으로 뻗은 길은 지금, 당신 앞에도 있다.
*행복의 중심, 휴식(울리히 슈나벨 지음, 김희상 옮김, 걷는나무 펴냄, 2011), 118-121p
우석영 생태철학자
2004년 초부터 2014년 초까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살았다. 아시아, 유럽, 북미의 산과 숲, 호수, 도시를 도보로 여행했고, 틈만 나면 걷고 있다.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 출판연구공동체 산현재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걸으면 해결된다 SolviturAmbulando』(공저), 『21세기를 살았던 20세기 사상가들』(공저), 『동물 미술관』, 『철학이 있는 도시』. 『낱말의 우주』 등을 썼고, 『디그로쓰』(공역)등을 한국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