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학교 3학년때, 동생과 둘이서 유럽을 배낭여행했다.프랑스의 에펠탑, 영국의 국립박물관, 스페인의 사그라마 파밀리아 성당등 근 삼주간 유명한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면서 이건 내가 기대했던 여행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10년넘게 살아도 동경타워에 올라가지않았던 나는 에펠탑에 가서 사진이랑 똑같네라는 동생의 코멘트에 동감하며 사진을 찍었다. 영국의 국립박물관에서 뭔가 많이 보기는 봤지만 기억에 남는 전시품은 없었다. 많이도 훔쳤다고 중얼거리며 슥슥 그림책을 넘기듯 눈도장만 찍었다. 이 여행은 유명한곳은 많이 가봤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참 뻔한 여행이었던것이다.
그때 이후로 난 여행을 갈때마다 꼭 가봐야할 명소, 맛집소개등의 정보등을 이전처럼 미친듯이 찾지않는다. 그 대신 평소 내가 일상생활에서 즐겨하는것들을 그곳에서도 할 수 있는지, 만나고 싶은 친구가 나의 행동영역 안에 살고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가서 남들 다하니까 나도 안하면 후회할거같은 일들을 과감히 버리기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박물관에 안가니 영국 박물관에 가도 즐거울 턱이 없는것이다. 나의 지적호기심이 지적이 아니라고해서 나의 여행하는 시간을 그런척하느라 쓸순없지않는가?
즐거운 여행준비의 하나는 요가를 하는것이다. 아쉬탕가요가는 아침에 수련을 하는데, 집에서 혼자 할 수 도 있지만 모여서 수련을 하면 집중도 잘되고, 선생님이 자세교정도 해주시기때문에 시간과 장소가 허락을 하면 수련원을 찾는 편이다. 비행기 표를 끊고 숙소가 정해지면 다음은 요가수련원을 찾아본다. 이게 은근히 검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런던에서는 나같이 여행하며 지나쳐가는 사람이 많은지 드롭인으로 들어가도 런던의 살인적인 물가에 비해 저렴한 곳이 많았고, 많은 유명한 선생님들이 런던으로 오기때문에 운좋으면 워크숍도 골라 들을 수 있다. 일본 역시 동경이외의 작은 도시에도 수련원이 촘촘히 있고, 아침에는 요가를 가르치고 낮에는 카레를 만들어 파는 괴짜같은 선생님들이 많아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새로운 풍경, 즐거운 만남이 며칠 후 나에게 올것을 생각하면 설레인다.
나는 고양이와 말을 사랑하고 스페인음식에 흥분하며, 허브를 키우고(자꾸 죽지만..) 꽃으로 집안을 채우는것을 좋아한다. 런던에 있을때, 숙소근처의 아담한 스페인레스토랑이 며칠간 우리의 저녁을 해결해 주었다. 그곳의 타파스와 와인은 아마 미셸린스타를 받은 곳보다 맛은 덜 하겠지만, 요근래 먹은 스페인요리중에 제일 맛있었기에 나는 충분히 즐거웠다. 꽤 늦은 밤에도 대낮같이 환한 런던의 백야를 즐기며 적당히 취해 슬슬 걸어서 호텔로 향할때 행복했다. 숙소가 가까우니 막차를 걱정하거나 택시비에 심장이 멈출거같은 쇼크를 안받아도 된다.
산과 나무와 농장, 강과 말과 새파란 하늘이 시야의 대부분을채우는 스코트랜드에서 날 계속 흥분하게 만들었던건 말타기다. 특별한 이유없이 말에게 무한한 호감과 친근감을 느끼는 나는 한시간반동안 말을 탈 수 있는 곳이 숙소근처에 있다는것을 알고 주저없이 예약을 했다. 장시간 말을 타본 경험이 없던 나는 내심 30분정도의 친절하고 자세한 오리엔테이션을 기대했지만 이미 말에 태워진채 가고싶은 방향으로 고삐를 틀고 서고싶으면 땡기라는 설명을 끝으로 초원으로 내보내질땐 떨어질까 무서워 뒤에서 잘다녀오라는 친구의 인사에도 고개고차 돌릴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 긴장이 풀리고, 서로에게 익숙해지자 그제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들은 안다는 길없는 풀숲을 지나고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않아 촛불로 불을 켠다는 교회를 지나쳐, 강을 건넜다. 강가에 도착하니 말이 알아서 물도 흐릅흐릅 마시고, 돌들을 용케 밟고 강을 걸어간다. 엉덩이가 들썩들썩할때마다 내가 상상했던 이상의 짜릿함이 두뇌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이 장면을, 연어가 강물을 헤치고 올라온다는 이 적색의 강위에 발이 젖지앉은채 말이 물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 몇초가 잠시나마 영원같이 느껴졌다. 아마 오랫동안 이 순간을 행복했던 추억으로 기억하며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하는 내가 있겠지.
집으로 가기 하루전, 브런치를 먹고 부른배를 두드리며 런던의 뒷골목을 걷다가 어느 젊은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이젠 먼 바다를 건너 타이페이 북쪽에 있는 우리집 거실 한쪽에 걸려있는 그의 그림이 눈에 들어올때면 평범한 저녁이 잠시나마 특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