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다페스트의 안식처
여섯째 날
- 마르기트 (Margit) 섬
두나 강 (다뉴브 강)에는 부다페스트의 북쪽 상류에 하중도가 하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마르기트 섬이다. 마치 우리나라 서울 한강에 여의도가 있듯이. 하지만 이곳은 우리의 여의도와는 달리 아직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온천도 있어서 모든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즐겨 찾아서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는데 비록 멋지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부다페스트 시내 구경도 좋지만 이렇게 도심 속 자연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콘크리트 건물만 가득한 우리의 서울처럼 삭막한 곳은 아니어도 부다페스트 역시 대도시인지라 사람으로 북적대는 도심에서 떨어져 우거진 숲 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보내는 것은 정말 편안하기만 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을 이 섬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그 동안 부다와 페스트지역을 트램을 타고 오가면서 바라본 숲이 무성한 이곳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무성한 그 푸근한 숲 그늘에 앉아서 그 동안의 모든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정리도 하고 다음에 있을 일정에 대해 생각도 하면서 하루를 조용히 명상하듯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를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아끼지 않고 안내를 나서서 최선을 다한 하바스씨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손님 대접 말고도 필요한 시간이 당연히 있기에 각자 자기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보내는 것도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기트 섬의 음악분수
섬은 상상 이상으로 컸는데 초입에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잔디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멋진 쇼를 보여 주는 분수가 있었다. 그런 인공적인 시설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냥 자연 그대로의 숲 속의 잔디밭에서 푹 쉬는 모습만을 상상하던 나의 바램이 조금은 일그러지기도 했지만 오히려 뜻밖의 광경을 재미있게 즐기기로 했다. 마침 내가 다가갔을 때 분수가 맞추어서 추는 음악은 우리가 흔히 듣는 요한 쉬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강"이었는데 그 음악분수를 즐기는 사람은 나 말고도 한 가족이 먼저 와 있었다. 그 들중 어린 아이들이 분수가 솟아 오르자 손을 내밀어 닿아 보려고 몸을 기울이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그 귀여운 모습이 참으로 천진난만하게 보여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새삼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의 노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곡이 끝나니 레하르의 "금과 은"이어졌으며 나는 발길을 옮겨 바로 인근에 있는 강가로 내려갔다.
작은 덤불 숲 사이의 길을 지나니 바로 두나 강의 물결이 찰랑대는 지점에 내 발끝을 댈 수 있었으며 흙과 작은 돌들이 그대로 깔려 있는 아직도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강변에 설 수 있었다. 강을 정비한답시고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모래사장과 수초가 무성한 강변을 덮어 버리는 우리네 도심 속 하천과는 다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참으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렇다, 우리가 편안한 느낌을 가질 때는 비록 그 것이 볼품없고 못났을지라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때 아무런 불편함도, 이질감도 없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새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마구 파헤쳐지고 덮여지는 우리나라의 지나친 난개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비록 잠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개발이 주는 매끈한 모양새나 편리함을 이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더욱이 전시행정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신경을 쓰는 공산 정권조차 이렇듯 두나 강변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개발"이라는 어리석은 자연파괴를 더 이상 놔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마르기트 섬 안의 공원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
강물에 손을 담가 보니 차갑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미 5 월말이라 높아진 기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강이 이 지점에서는 평소에도 그다지 차갑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비록 강의 기원은 알프스산맥의 빙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상당히 탁한 물이었지만 하바스씨의 말처럼 그다지 더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비록 수질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우리의 낙동강이나 한강보다 오염이 되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강 건너 저편의 키 높이가 비슷한 건물들이 서로 서로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며 서있는 것처럼 보이며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이 반짝이며 흐르는 강의 물결과 함께 아름답게 비쳐 왔다.
공원 안을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아보니 섬 중간 부분에 상당히 넓은 풀밭이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놀고 있었다. 어떤 이는 아이와 함께 놀이를 하고 어떤 이는 유모차를 몰면서 산책을 하며 어떤 이는 풀밭에 누워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무척 한가롭게 보이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게 보였다. 나도 잠시 잔디밭에 누워서 하늘을 보니 하늘색은 우리와 똑 같이 푸른색이며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의 산골짜기 어디쯤에 있는 잔디밭에 누워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긴 이 세상 어느 곳이든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라면 누구에게든 마음 편안한 곳이 아니겠는가.
온 가족이 함께 합심하여 페달을 밞아 나아가는 다인승 자전거 - 마르기트 섬에서
이 섬을 연결하는 다리는 두 개가 있는데 나갈 때는 들어올 때와 다른 쪽으로 걸어 나가기로 하고 그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 다리는 섬 북쪽 끝에 위치하며 다리 너머 페스트지구에는 새로 지은 높은 건물들이 많아서 기존의 도시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아마도 신시가지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비록 최신식의 건물들은 아니지만 구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예술적인 건축물은 없었다.
한참을 걸어 그 곳을 지나서 하바스씨의 집으로 돌아가는 트램을 타기 위해 시내 중심가를 향하였다. 트램 정류장을 향하면서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사기 위해 잠시 시내 중심가를 둘러보는 내 눈에 띄는 헝가리 민속의상을 입고 있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보니 시골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장이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이 나라에도 외국에서 들어오는 농산품에 대한 자국의 농산물 지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어느 나라든 값싼 수입품과 대항하는 토종 생산물의 경쟁은 쉽지 않은 법이다. 부디 좋은 결과를 얻기를 기대하며 그 곳을 떠났다.
하바스씨 댁으로 가는 트램이 서는 길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다 보니 몇 사람의 거리의 악사들이 보였다. 유럽 대부분의 유명 관광지에는 어디서나 이런 악사들이 있기 마련이고 부다페스트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악사들은 집시도 음악도들도 아닌 남미에서 온 듯 보였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와 음악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남미, 특히 페루의 민속음악들이었다. 조금은 처량하고 심금을 울리는 구성진 가락이 우리네 정서와도 잘 맞아서 우리나라에도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데 비록 때에 전 듯한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함께 지친 표정이 애처롭게 보였지만 연주가 끝나고 다시 이어지는 사이사이에 보이는 미소는 참으로 순박하게 보였다.
헝가리 민속의상을 입은 젊은이들과 함께
- 푸짐한 저녁 식사
하바스씨 집으로 돌아오니 부엌에서 하바스부인이 장만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 나와는 마지막 저녁이라며 특별한 음식을 장만한다며 웃는 모습이 무척 다정하게 와 닿으면서 마치 우리가 이미 가족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바스부인의 얼굴 표정과 미소는 마치 수줍고도 인정 많은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 아낙네와 같았고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구 공산 치하에서 러시아를 배웠기에 러시아 말은 조금 한다고 하였지만 아쉽게도 영어를 전혀 하지 못 하였다) 지내는 내내 따뜻하게 보살펴 주어서 참으로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다.
마지막 저녁식사, 이 날은 수잔과 스티븐도 참석해서 모두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그녀가 준비한 저녁은 순수 헝가리 음식만이 아닌 보통의 유러피언 스타일이었는데 시작하면서 바로 나오는 살구색의 크림수프는 그 동안 맛보았던 일반적인 크림수프와는 맛이 달랐다. 요리하는 과정에 넣는 재료가 하바스씨 부인만의 비법이 있었으리라. 곧 이어 나오는 정찬으로는 다양한 채소를 익혀서 곁들인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헝가리식으로 요리한 음식이었는데 특별한 것은 함께 나온 쌀밥이었다. 내가 한국인인 만큼 한국인의 입맛에 대한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입맛을 돋우기 위해 곁들인 술은 헝가리산 와인이었는데 식사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유니쿰(Unicum)으로 입가심을 하였다. 이 술은 도수가 조금 높은 편으로 마시기는 쉬운 술은 아니지만 향기도 좋고 소화를 돕는 작용을 하기에 누구에게나 조금이나마 권할 만한 술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함께 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추억을 간직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