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다페스트를 떠나며
일곱째 날
- 살츠부어크(Salzburg)를 향해
마지막 아침이 밝았다. 지난 일 주일 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 것이다. 상대성 이론을 이해시키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즐겁고 좋은 시간은 한 시간도 일분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고 했는데 나의 느낌이 바로 그랬다. 인정 많은 하바스부인의 훈훈한 마음처럼 소박하지만 따뜻한 아침 식사를 하바스씨와 하고 있으니 부인이 조그만 선물을 가져 온다. 평소 만들어 두었던 손수건이다. 빨간 천에다 손수 장미꽃다발이 가득한 수를 놓아서 예쁘게 만든 손수건이었는데 전통 헝가리 자수라고 한다. 비록 질 낮은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기념품 가게에서 몇 가지 조그만 선물만 가지고 갔던 나의 성의부족에 비해 부인의 선물은 정말 정성이 가득 담긴 큰 선물이어서 마음이 고마운 마음에 앞서 오히려 그 선물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렇듯 따뜻하고 정답고도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다니 참으로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홍차 한 잔까지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바스부인과 가벼운 작별의 포옹을 한 뒤 짐을 들고 트램을 타러 나갔다. 비록 좌석을 미리 예약하였고 역의 위치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친절한 하바스씨는 나의 가방 하나를 먼저 들고 나서며 역까지 동행을 해 주었다. 역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20 분 정도. 비록 이 나라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이지만 우리의 대도시에 비해서 도로 사정은 좋은 편이어서 교통체증은 없는 듯 보였다. 트램의 선로는 자동차 도로 위에 얽혀 있기에 때로는 트램과 자동차가 뒤엉킬 것도 같지만 신호체계가 잘 되어 있어서인지 전혀 그런 일 없이 트램은 잘 흘러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트램의 창을 통해 한 번 더 둘러보는 내 눈에 들어오는 부다 캐슬의 웅장한 건축물들 그리고 마르기트 섬 옆으로 지나가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웅장하고도 화려한 국회의사당과 변함없는 표정으로 유유히 흐르는 두나강과 그 위를 타고 오르내리는 화물선들... 모든 것이 새삼 아름답게 보이고 내 가슴 속에서 영원하게 남을 판화처럼 찍히는 순간들이었다. 언제든 다시 한 번 더 올 기회는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이 소중한 경험을 가질 그 날까지 간직하기 위해 트램의 창문을 통해 열심히 그 풍경을 눈망울에 담아 두려 애썼다.
부다페스트에는 2 개의 큰 역이 있지만 내가 출발하는 뉴가티(Nyugati - 서쪽이란 뜻)역이 가장 크며 중심이 되는 역, 즉 중앙역이다. 역 건물은 정확한 형식은 알 수 없으나 바로크 양식을 바탕으로 한 동구권 특유의 느낌이 드는 세련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작은 돔 형태의 지붕을 이고 있는 탑을 좌우에 둔 독특한 건물의 아름답고 웅장한 그 자태로서도 수많은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훌륭한 건축물이었다.
뉴가티 (Nyugati) 역 - 사실상 부다페스트의 중앙역이지만 정식명칭은 서부역이라고 한다
부다페스트에서 살츠부어크까지는 한 번에 바로 연결되는 기차가 있다. 마찬가지로 살츠부어크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이어지는 오스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이미 깔려 있는 철로 위를 달리는 그 열차의 이름은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가장 번성했던 기간에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여인의 이름이다. 이 열차는 부다페스트에서 불과 4 시간 정도면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 닿으며 살츠부어크까지는 대략 5 시간 반이면 도착한다. 하루에 십 여 차례나 기차가 운행되며 이 외에도 고속도로와 일반 도로 등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이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단지 국경이 아닌 경계선으로 두 군데의 지방으로 눈 하나의 나라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열차 앞에서 하바스씨와 함께
나는 열차가 출발하기 전 남는 시간을 이용해 하바스씨와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언제든 기회가 되면 한국에 오라고 초대를 하였다. 비록 그 '언제'가 어느 때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느끼고 받은 환대를 꼭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하바스씨는 예전부터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로운 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큰 만큼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무척 크지만 경제적으로나 건강상의 문제로 머나먼 우리나라까지 여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대답을 하여서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헝가리와 가까운 주변국으로 여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한국까지 날아 온다는 것은 여러모로 부담이 될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굳게 마주 잡은 손을 크게 흔들며 작별의 악수를 하였고 객차의 예약된 좌석으로 돌아간 나는 차마 앉지 못한 채 차창 너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계속 손을 흔드는 하바스씨를 바라보았다.
기차는 잠시도 지체 없이 정시에 움직였다.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최상의 환대와 즐거운 시간이 조금씩 또 천천히 달리는 기차 뒤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다음 여정인 살츠부어크에서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주일 내내 나를 더 없이 행복하게 해 주었던 하바스씨와 그 분 가족이 내게 배려해 준 따뜻한 환대는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며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는 것을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바라보는 차창을 스치는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모습에서 깨닫고 있었다.
살츠부어크로 가는 열차의 창을 통해 바라 본 헝가리 평원, 지평선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