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위처럼 누워서 재앙을 반긴다.'

정보라의 소설 '저주토끼'를 읽고

by 김틈


정보라 단편집 '저주 토끼'를 출퇴근 전철에서 단숨에 읽었다.

작가가 스스로 설명한 '재미를 위한' 환상 호러...라는 말이

이렇게 현실적일 수 있나.


비현실은 현실을 현실적으로 압도한다.

압도적으로 끔찍하게 재밌는 건... 오로지 현실뿐.


타인의 고통은 관람의 대상이 되었고

모두의 문제는 타인의 문제가 되었지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불안에 갇혀있고.

어른들의 희망은 스스로의 절망에 늘 구타당하고.


기회의 본질은 눈치에 침식당하고

기회는 기회가 아닌 타고난 행운이 되어버렸지.


공평한 검은 밤이 찾아오거나

공평한 하얀 눈이 내려오거나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변화의 검고 흰 점들이

시간의 도화지 위에 펼쳐질 때


나는 바위처럼 누워서 재앙을 반긴다.

바위처럼 누워서 버티는 삶을 짊어진 자들에게

뒤덮여오는 변화의 힘이 무엇 인지를

가장 앞서 있는, 가장 앞서 가려는 자들이

상상할 수 있길 상상해 본다.

멈춰선 바위들은 멈춰있지 않다.

순서를 양보하고 길을 내어주는 게 아니다.

자리를 지키는 일이 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 것

아주 천천히 밟은 땅을 움직여 걷게 만드는 기적.

바위들은 멈출줄을 모른다.


그 사이사이,

좁거나 넓거나 거칠거나 고르거나

삶의 통로가 열리는 것

닫힌 것들은 더 이상 통로라 부를 수 없는

일종의 무덤


그 통로와 무덤의 군락에서


기왕 웃음이 울음보다는 더 많길.

혹은 부족한 웃음이라도 기억되도록 짙고 따뜻하길.


그 웃음이

다가올 재앙들의 다음 이야기를 여는 실마리와 단서가 되겠다.


2023년 11월 28일, 그리고 2025년 6월 10일에 보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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