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화이트 노이즈
“봄은 들린다. 보기 전에도 들린다.”
봄은 초록과 꽃과 녹는 땅을 '보는'것이지만.
비로소 온기가 느껴지는 계절이 된다는 건 봄(see)이 아니라 들음(hear)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봄은 봄의 한가운데서 듣기 좋다.
그리고 봄은 보여주기 전에도 들린다.
유난스레 춥고 시린 겨울 끝, 어린애 심통 풀리듯 봄이 들렸다. 그렇다! 봄은 들린다. 겨우내 감춰진 귀가 쫑긋 하는 봄은 계절이라기보다는 소리다. 눈과 땅이 녹아 들리는 물소리와 새소리, 등굣길에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 그보다 더 전 겨울과 봄의 경계선에서 조용히 땅 가까이 귀를 대어 보면 땅 밑에선 봄이 켜는 기지개 소리가 들린다. 미세하게 부드러워진 땅과 아직은 차가운 바람 사이의 틈을 통해 초록색 예고편을 들려주고 있다. 싹이 틔어오르는 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들어보라(주변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꼭!). 주변이 고요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 소리를 만날 때의 기쁨은 얼어붙은 시대에 독방에 갇혔던 독립운동가들이 시대와 민족의 봄을 기다리며 서로 '통방'하던 소리와 닮았다.
판소리 ‘단가 사철가’는 봄을 노래한다. 물론 4계절을 다 노래하지만 봄부터 노래해서 봄이 더 유명한 가락이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 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구나...' 봄은 꽃과 풍경이 아니라 재잘거리고 흥겹고 사랑스러운 소리가 함께 와야 한다. 단가 사철가는 쓸쓸하지 않은 봄과 그렇게 겨울까지 이어지는 봄의 여운을 담고 있다.
소음, 소중한 소리, 소소한 소리
사전적으로 소음은 듣기 싫은 소리라고 정의된다. 잡음도 비슷하다. 듣기 싫다는 것은 누구의 주관일까? 사전을 집필한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사람들이 꺼리는 소리라는 의미일 텐데 소리에 대한 획일적 판단은 아닐까 걱정된다.
일요일 단잠을 깨우는 엄마 잔소리, 마음에 실금이 가던 늙은 아버지 기침소리, 밥 달라고 짖던 반려견,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 바쁜 택배 차의 엔진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 배달 오토바이 소리와 전화벨소리... 배경으로만 머물렀던 이 소리들은 소음이고 잡음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소리고, 살아있다는 소리다.
깊은 산길이나 어두운 밤길을 해메이다가 북적이는 도심의 소음을 만나면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가... 그 순간 소음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소중한 소리'가 된다.
그리운 화이트 노이즈
소음이 미움받는 장소 중 하나는 독서실, 요즘말로 ‘스터디카페’다. 그런데 모순적으로 이 '스카'에는 ‘소음발생기'를 대여한다. 이미 ‘White Noise(백색소음)’는 이 업계에서는 꽤 중요한 서비스다. 지나치게 정적인 환경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소리까지 예민하게 만드니 적당하게 소리를 지우는 배경으로서 작은 소음을 내는 ‘백색소음 발생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 백색소음 발생기는 일요일 늦잠을 타박하던 엄마, 아빠의 목소리처럼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던 소리 아니었을까? 이젠 그런 소리가 없어서 일요일 아침은 적막하게 고요하다. 이제는 그 고요한 일요일 아침을 내가 '그만 일어나렴!' '주말에도 책 좀 봐야지' 하며 화이트 노이즈를 만들어주고 있다. 언젠가 그 소리를 먹고 자란 아이들도 닮은 소리를 만들어낼까?
고개를 돌려보니 봄에 속삭이던 초록잎들은 제법 줄기와 잎을 번창시켜 바람과 포옹한다. 바람과 껴안을 때마다 가을과 전화통화를 하듯 속삭이는 소리를 낸다. 덩달아 높은 나뭇잎들도 떠남과 만남이 분주한 역 대합실처럼 왁자하게 속삭임을 합창한다. 그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서 나는 당신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