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과 가장 닮은 음악 '아쟁산조'
울음은 세상만물의 공용어
우리는 거의 대부분 태어날 때 울음을 터트렸다. 슬픔이나 괴로움의 표현 아니다. 그때의 울음은 '생존'과 '탄생'의 의미로서 호흡에 가깝다. 말과 글을 쓸 수 없는 우리는 배가 고프거나 필요할 때 울음을 운다. 같은 이유로 동물들의 소통도 우리는 '울음'으로 바라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새 한마리 창 밖에 날아와 '운다.'
언어 이전의 언어는 울음이다. 그런데 동물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한 여름 매미가 울고, 매서운 겨울바람도 운다. 장마철 가난한 집의 벽지도 운다. 울음은 생물과 무생물 모두가 사용하는 만물공용어, 유일한 공감의 언어다.
아쟁은 울음의 악기이다.
우리 악기 아쟁은 울음의 악기이다. 물론 비탈리의 샤콘느를 연주하는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의 바이올린을 듣고 있어도 울음이 떠오른다. 하지만 울음도 수 백가지의 종류가 있다. 독재를 위해 싸우던 시절 당대를 대표하던 지식인 '대학생'들이 패배한 시위 후에 음악카페에서 듣던 하이페츠의 샤콘느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달리, 아쟁은 논밭에서, 공장에서, 때론 평범한 초가의 호롱불 아래에서도 들리는 울음소리를 '닮고' 있다.
특히 산조아쟁은 그 역사가 짧다. 일설에 의하면 불과 100년도 안된 역사에 그 탄생의 비밀도 각종 설이 있다. 어떻든 간에 인간이 가진 울음을 가장 가깝게 공감하면서 또한 우리가 닿지 못한 울음의 세계까지 표현한다는 점에서 산조아쟁은 귀에서 울음이 담긴 마음속 어느 지점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주파수를 갖고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태고의 울음을 품고 가로의 줄을 세로의 활로 가로지르며 세상에 그어내는 감정의 좌표이다. 그 좌표 위에서 역시 가로의 세상 위에 세로로 서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아쟁산조는 닮은 꼴이다. 아마도 먼 훗날 세상의 가로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누워 침묵하는 날 전까지 삶은. 아쟁은 이 감정의 좌표 위에 무수한 곡선을 그리며 함께 울 것이다.
미국인들이 관심 가졌던 악기
2008년 뉴욕의 거리를 불세출의 젊은 음악가들과 걸었다. 그들의 이름도 불세출. 한 기타 전문점에서 여러 가지 악기를 보면서 아쟁 소리를 들려주자 큰 흥미를 보였던 기타 판매점 주인. 이후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 공연장에서 만난 미국인들에게 인상 깊게 남은 소리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도 '아쟁'. 물론 '첼로'와 참 닮았어 그런데 묘하게 '달랐어'라는 표현과 함께 그들은 아쟁에 눈독 아니 귀독을 들였다. 왜 그럴까? 그 비밀이 바로 울음과 슬픔, 즉 만물공용어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쟁산조는 삶의 그늘이다.
이 아름다운 곡선이 그려낸 삶의 방정식은 울지 못하는 시대, 눈물과 슬픔은 숨겨야 할 것이 되어버린 감정의 사막에서 감로수를 찾는 길을 알려준다. 기쁨과 웃음이 대량 생산되는 뙤약볕의 현대사회에서 우음 은 삶의 그늘이 되어준다. 그 그늘 아래에서 맺히고, 막힌 것들이 풀리고 흐른다. 그렇게 우리 음악이 된다. 아쟁이 운다. '울지 마라'가 아니라 맘껏 '울어라'라고 하며 우리가 잊었던 울음의 언어를 되살려주며 아쟁이 운다. 그 울음을 거쳐서 아파야 할 것들이 제대로 아플 수 있다. 비로소 이 공감의 시간을 통해 희로애락의 4계절이 만들어진다. 아쟁산조는 그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음악이다.
아쟁산조는 강물이다.
산조는 한 사람이, 한 생을 통해 완성한 독주곡이다. 그냥 삶이라고 부르면 그대로 어울릴 음악 산조. 아마도 삶의 곡선과 산조의 곡선은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곡선 중에서 아쟁산조는 특히 '강물‘ 의 곡선과 닮아있다. 서두름 없이 마음껏 굽어 흐르는 아쟁산조는 곡선의 음악이다. 강물의 음악이다. 목적지에 가는 것 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비옥한 농토의 갈증을 채우려 맑은 생명수로 제 몫을 나누며 천천히 흐르는 강물. 생각해보니 왜 강은 운다고 하지 않았을까? 강가에 나가 계절마다 다른 강의 울음을 듣는다. 원초적 동물처럼 고요하게 때론 부산하게 울음을 우는 강. 그런 원초적 강에 기대어 인간은 거대한 문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강의 울음은 기억에서 지워져버렸다.
(사진 : 2023년 5월 한강 하구 행주산성 부근, 김틈)
울음은 곡선이다.
아쟁 소리를 듣다보면 강물의 삶을 닮기도 했지만... 늑대의 울음도 들리고 슬픈 인간의 하소연도 들린다. 그것들을 모아 공통점을 찾아보면 그것은 '곡선'이다. 하지만 첨단을 달리는 디지털 시대는 이런 곡선이 아니라 0과 1의 정보가 구현하는 99.999%의 모방을 추구한다. 가장 진짜와 가깝지만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디지털, 어쩌면 그런 시대에 인간은 0과 1의 디지털이 아닌 부드러운 아날로그의 곡선에 더 목말라 있을지도 모른다. 모방이 될 수 없는 진짜 삶의 모습이 바로 그 곡선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더욱 건조하고 팽팽한 직선의 모습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할 때, 잠시 멈춰 서서 아쟁산조를 들어보자 투박한 개나리 활도, 말총으로 잘 다듬어진 활도 모두 팽팽한 직선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울음을 운다. 울음은 곡선이다.
곡선은 당신의 주변까지 이해하며 당신에게 다가가는 기하학이다. 그래야 비로소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목표달성만을 향해 질주하는 시대에 우린 곡선에 목마른 울음을 잃어버린 슬픈 동물들인지도 모른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쟁을 듣고, 아쟁과 운다
눈물을 자발적으로 금지한 시대, 진실의 문을 열어줄 울음이 위험이 되는 시대다. 웃음산업이 감성의 가뭄을 만든 이 시대에 당신의 울음소리가 궁금하다. 그런데 기억속의 울음조차 지워졌다면 아쟁소리를 들어보자. 활과 현이 서로를 껴안으며 만들어내는 소리를 만나보라. 이태백이나 윤윤석이나 박종선이나 그 누구의 음악도 좋다. 왜 우는지 묻지 말고 가만히 그 울음에 소리굽쇠처럼 나의 마음을 맞춰 함께 울어보자.
가을이 문득 가깝다. 강물은 유난히 하늘 빛을 수확하느라 바쁘다. 아쟁 소리에 잠시 멈추던 강물은 구불 구불한 현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허망하게 가족을 떠나보내고, 매몰찬 세상에 아물지 않는 흉터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맘껏 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라. 어머니로부터 태어날 때 울었던 그 울음의 곡선이 지금의 삶으로 이어지게 하라. 우린 모두 울어야 한다.
* 세계의 공통언어는 자멘호프가 고안한 '에스페란토'어. 하지만 '만물공용어는 샤람만이 아닌 자연과 시간까지도 공유하는 공통언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