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재 시인, 난다, 2023
무채색에 얽힌 백 가지 사랑
용기와 사랑을 물려받은 시인이 건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로 첫 시집을 낸 고명재 시인의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가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은 ‘사랑’이라는 이상한 리듬을 말하기 위해 무채색으로 이루어진 백 가지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사랑은 세상에 색감을 더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큰 날개에 깃털 하나를 더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사랑을 시인은 무채색이며 덜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어떻게 색상과 채도가 없고 밝고 어두운 차이만 있는 무채색을 사랑이라고 말하게 된 걸까. 이 산문집이 기획된 의도는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할 때는 그에 맞는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왜 본인의 사랑이 무채색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고 보여준다. 기름 속에서 천천히 모양을 잃지 않게끔 약간의 힘으로 뒤집는 두부,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몸을 움직이는 동생의 옷에 묻은 밀가루, 비구니의 조끼, 장독에서 스스로 견디는 장을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만으로도 기획 의도가 충분해 보였다. 시인이 물려받은 사랑은 고요하며 점점 단단해지는 형태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이 손을 포개 온도를 더했다는 것. 쌀을 깎듯 희고 정갈한 사랑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하고 찬란한 사랑의 언어가 있다면 시인에겐 고요하지만 용감한 사랑이 있다. 이 산문집은 시인의 빼곡한 사랑을 확인한 이후로 기획된 책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유추해 본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들어가며 - 「색색마다 거두는 게 사랑이라」
처음 수록된 글의 후반부에는 위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책에 등장하는 시인의 유년 시절에는 어떠한 굴곡이 존재하지만, 경사를 넘어가기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저 문장에 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랑받은 사람이다. 자신을 길러준 비구니의 손, 엄마가 멸치를 만지던 손, 동생이 옆구리를 데우며 잡은 손을 통해 온도를 쌓아왔다. 그 온도는 “왕릉만한 비탈”(「능陵」)을 넘고도 먼 미래를 살아가기에도 충분한 온도일 것이다.
이 산문집을 얘기하려면 그의 유년 시절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려운 형편으로 비구니의 손에 자란 시인은 비구니와 함께 시장을 걷거나(「구순암」),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비구니」)를 들으며 자랐다. 누군가 보기에는 처연하고 슬픈 환경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시인에게는 기쁘고 복된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구니와의 생활에서 그는 사랑을 배우고 넘쳐흐르는 마음을 용감하게 전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든 슬픔이 몸을 통과한다고 해도 시인은 “너무 보고플 땐 도라지를 씹어”(「도라지」) 삼키는 방식으로 사람을 기억한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배워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어깨를 보며 삶을 바라보고 생활하다 어느새 바라본 누군가의 사랑을 자신도 모르게 물려받아야지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이라는 말만 보아도 갑자기 멈춰 서게 되는 사람의(「능이버섯」) 태도를 생각한다. 승僧과 등을 생각하며 용감하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 기억의 부름을 통해 확인한 사랑은 아무리 그가 무너질 법한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질 수 없게끔 만든다. 그가 물려받은 사랑은 잘 쌓인 요처럼 단단하기 때문이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읽으면 자신을 떠나지 않는 몇 이야기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고야 만다. “비와 눈”(「편지지」)처럼 온다. 오고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고야 마는 기억은 힘차게 쏟아져 내린다. 남아있는 사람은 쏟아지는 기억을 온몸으로 받으며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도 몇 개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내밀해서 품으로 끌어안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품은 그들이 머물기엔 너무 뜨거워졌다. 그들에게 물려받은 빵 반죽처럼 부풀어있고 아주 높은 온도이기 때문이다. 다 사람에게 배운 것, 그것으로 다음 사람이 살고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사랑을 물려주는 것. 사랑의 실천,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순간이 사랑이 아닌 순간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산문집은 독자의 품에 있는 이야기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문을 열면 이야기가 눈밭을 달려가는 말라뮤트처럼 뛰어갈 것이다. 나는 이야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등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