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혁 시인, 문학동네, 2023
김상혁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가 문학동네시인선 192번으로 출간되었다.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이야기의 시에서 더 나아가 이야기에서 서로를 돌보는 태도를 보여주며 아이러니함을 극대화한다.
누군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단순히 누군가의 일화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전달하는 목적으로의 발화인 경우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로 스며들어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후자의 이야기는 공적인 이야기, 즉 고통이나 행복 혹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사적인 이야기가 일차원적인 이야기라면 공적인 이야기는 다면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다면적인 이야기는 사람의 모습 같다. 사람은 한 부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부분이 있어 우리는 한 사람에게서 다양한 빛을 마주하곤 한다. 이야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이야기를 사람이라 부르거나 유령이라 불러도 되지 않나.
시인은 계속해서 이야기로 시를 써왔다. 이야기하겠다고 선포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에 들어간 시점에서부터 시를 펼친다.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시작부터 이야기인 공간에서 시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발화는 독자에게 납득할 수 있냐는 물음 자체를 던지지 않는다. “한때 나의 아이는 너였다”(「춘분」)고 말한다면 왜 내가 네 아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아이가 너라고 해도 그렇겠다며 인정하고 시작할 수 있다. 현실이 아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끝이 나는가? 네가 나의 아이라는 말은 거기서 끝나는가? 그렇다면 시로 쓸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시는 이야기에서 끝나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이야기에 아직 머물러 있다. 이야기에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고 다양한 이야기가 얽힌 곳에서 어느새 이야기 자체가 되어 등장하는 인물을 긍정하거나 새로울 일이 없다고 해도 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해 사람의 집이 되어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김상혁 시인의 시는 벌집처럼 큰 벌집 속에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일 인실을 많이 만들어둔 것 같다. 독자는 시인의 시를 읽으며 새집을 만들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이야기 자체가 이야기가 아니라거나, 우리의 삶 자체가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시를 얘기하기 전 시집의 제목을 생각한다.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큰일은 얼마만큼 큰일일까? 얼마나 더 힘들어야 큰일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힘듦을 바라보면 누군가가 그 감정을 플랫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큰일은 점점 작은 일이 되어가고 사소한 일이 된다. 시인은 이러한 지점에 주목한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 ‘큰일’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가 정말 ‘큰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시인인 시를 통해 ‘큰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곧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 “나의 잠을 밑으로 밑으로 영원히 끌고 가리라는 것”(「놀라운 자연 2」)을 언급하며 염려한다.
시인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생각한다. 큰불이 난 산으로 그가 들어가려 하는 모습을 보며 더는 우리 앞에 그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거나(「두고 온 사람」), 사람 정말 싫다고 말하면 다정한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말해주는(「노크」) 정반대의 상황 또는 아이러니한 부분에 주목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사람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스산한 시선이라고 해도 사람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아플 때는 그 마음도 지키지 못했다
도시와 집이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친구를 원하고
친구가 나를 원하는 그 시간에
우리가 그것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좋은 것」 중에서
모든 이야기가 지나가더라도 시인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같이 나누는 사람과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의도적인 이타성이 아닌 우러나오는 마음을 진심으로 대한다. 복잡해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아는 사람이 서투름에도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는 모습은 처연하다. 처연하지만 그는 이야기라는 곳 바깥에 서서 이야기를 펼쳐 사람을 직접 만나고 기다리는 의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디에나 속한 우리는 이야기에서 살아간다. 김상혁의 시는 그것을 활용하며 구전하듯 이야기를 전한다. 몸짓으로, 말로, 감정으로. 무엇이 되든 무엇이 된다는 믿음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아무리 삶에 큰일이 일어나도 괜찮다. 이 삶은 이야기니까. 이야기에서 우리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큰일’이 더는 큰일이 아니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을 이겨낼 수도 있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야기가 되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