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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훈 Nov 29. 2023

『라디오 체조』

오쿠다 히데오, 이영미 옮김, 『라디오 체조』(은행나무, 2023)


주먹을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오쿠다 히데오, 이영미 옮김, 『라디오 체조』(은행나무, 2023)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 찾게 도와주는

닥터 이라부의 이상하고 날카로운 처방전


오쿠다 히데오의 『라디오 체조』가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다. 『라디오 체조』는 오쿠다 히데오의 대표작 ‘공중그네 시리즈’로서 17년 만에 출간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정신과 의사 이라부와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조수인 간호사 마유미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후속편을 거부하던 오쿠다 히데오는 팬데믹 이후의 혼란과 불한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귀환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상하기에 마음을 관통하는 이라부의 치료에 독자들은 읽는 순간 유연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팬데믹 이후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코로나 블루로 불리기도 했다. 바깥을 나서지 못해서 우울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람 간의 교류가 없어졌기에 고독을 집에 들여 커다란 수렁으로 빠지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크게 힘들었던 것 같다. 상담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의 문제는 너무 많은 생각으로 불안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화로 선생님과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믿지 못했지만, 점점 만날수록 달라지는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알게 된 건 사람 간의 일은 사람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체조』에 등장하여 치료받는 인물들은 각자 다른 심리적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다. 시청률에 미친 PD, 화를 낼 줄 모르는 세일즈맨, 강박이 심한 피아니스트, 오래 격리된 탓에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대학생 등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심리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고립은 서서히 마음의 목을 졸라 서서히 숨통을 조인다. 숨의 끝에 매달린 사람들은 긴박해지고 어딘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이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이 버틸 수 있다고 한다지만, 어떻게든 의사를 찾게 되고야 만다. 그들에게 필요한 의사는 어떤 의사가 좋을까. 아무래도 여유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좋을 듯하다. 타인의 호흡을 한 번 끊어 일정하면서도 느릿한 박자를 몸에 심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라디오 체조』에 등장하는 닥터 이사부다.

이사부의 처방은 다른 의사들과는 다르다. “그만둘 거면 다 써버려. 1엔짜리 하나 남기지 말고.”(「어쩌다 억만장자」) 돈을 탕진하라고 하거나, “일단 지각부터”(「피아노 레슨」) 하라는 식으로 행동을 교정한다. 그의 처방에 환자들은 이사부를 미쳤다고,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사부가 요청한 행동을 조금씩 시도하는 환자들에게서는 처방보다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자신이 겪는 괴로움이 서서히 해소된다는 점이었다. 어딘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 서서히 풀리는 듯한 기분을 경험하면서 환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이사부가 환자들의 꽉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주면서 힘을 멀리 놓아주는 것은 아닐까. 의사처럼 행동하고 말하진 않지만, 어느 의사보다 더 확실하게 치료하는 이사부의 처방은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까지 나왔다. 

가슴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단번에 배출된 느낌이 들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돌발적인 행동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해냈어. 껍데기를 깼어. 

스스로를 칭찬했다.


「라디오 체조 2」 중에서


「라디오 체조 2」에 등장하는 가쓰미는 화를 내지 못하고 쌓아둬서 화병(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에 걸린 사람이다. 그를 위해 이라부는 “일단 나가서 고함부터” 쳐볼 것을 권한다. 함께 차를 타고 난폭 운전을 당했던 도로로 가보며 정상 속도로 가다가 사고를 내보기도 한다. 이라부는 언뜻 보면 가쓰미의 분노를 키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매번 당하던 난폭 운전과 다른 화나는 일을 겪으면서 억지로 화를 낼 수 있는 굴뚝을 마련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처방으로 가쓰미는 여러 일을 겪으며 마지막에는 화를 낼 수 있는 인물이 된다. 나는 이라부의 행동이 가쓰미의 혈을 뚫은 것처럼 보였다. 그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은 이와 같다.



여하튼 그 의사 선생이 나오면 묘하게 치유가 되더군.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거겠지. 

우울함의 특효약은 힘을 빼는 걸지도 몰라.


「해설자」 중에서


결론적으로 보면 이라부의 처방은 힘을 빼주는 것이었다. 「라디오 체조 2」에 등장하는 가쓰미도, 다른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라부의 처방으로 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게 된다. “유야는 한 번쯤 자기를 깨보고 싶은 기분”(「퍼레이드」)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전액 기부”(「어쩌다 억만장자」)를 생각하게 된다. 이라부는 혈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고 이후를 담당하는 건 전부 환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생활에서 힘을 조금 풀었을 때의 여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파장이 되어 개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주 큰 기쁨으로 말이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주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가 있다. 이라부의 기묘하지만 어딘가 편하게 만들어주는 처방은 힘들고 빡빡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이라부가 필요하다. 잠시 손에 쥔 것들을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 옥죄는 생활에 숨통을 틔는 쉼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라디오 체조』가 도와줄 것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라부의 유쾌함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다.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얼굴에 힘을 풀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이 미래를 여는 도입부가 되기를 바란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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