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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훈 Dec 10. 2023

[핀사단]『세모 네모 청설모』-민구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현대문학, 2023)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조용하지만, 고요하지 않은


당신의 세계가 흔들릴 때 믿고 쥘 수 있는

"좋은 징조"의 장면


현대문학 출판사의 한국 문학 시리즈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의 마흔아홉 번째 시집으로 민구의 『세모 네모 청설모』가 출간되었다. 『배가 산으로 간다』,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해』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을 출간한 민구의 『세모 네모 청설모』는 일상적 세계를 비트는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덤덤하고 조용하지만, 심심하지 않고 웃다가 웃을 수 있는 민구의 시를 통해 일상에서의 행복을 몸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부터 총 네 번, 그러니까 한 달 가량 매주 시 한 편을 필사할 것이다. 매번 서평단만 신청하던 나는 필사까지 하게 되었다. 필사라는 것을 군대 이후에 해보지도 않았던 나라서, 글씨가 어긋나고 띄어쓰기를 애매하다. 하지만 필사는 필타처럼 시를 새긴다는 감각이 좋아 시도할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 같다. 매주 목요일마다 민구 시인이 직접 골라주신 본인의 시를 필사하면 되는 듯하다. 그래서 미리 읽지 않았다. 마음먹으면 하루 만에 다 읽을 수도 있을 분량의 시집이지만, 조금이라도 천천히 맛을 보면서 읽고 싶었다. 그의 시에는 나도 모르게 나를 멈춰 세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민구의 시는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그의 첫 시집과 아침달에서 출간된 두 번째 시집을 포함해서 말이다. 정갈하고 무난하다. 정갈하다는 말과 무난하다는 말은 시인에게 안 좋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을 자신의 색으로 만든 시인은 많지 않다. 정갈하고 무난한 식사는 언제 어디서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기도 하다. 그런 것 같다. 민구의 시는 읽을 때마다 맛이 좋다. 그의 비법으로 만들어진 정갈함과 무난함은 쉽지도, 가볍지도 않다.


이번 주에 내가 쓰게 될 시는 「우리 사이」이다. '우리' 사이에 거리를 두어 그 거리를 끝도 없이 늘린다. 거리에 오토바이나 노인과 함께 지나는 강아지가 지나가도록 비워본다. 그러다 더 넓혀 일상의 장면을 섞고 아주 복잡한 거리를 만들어본다. 하지만 복잡함은 평생 복잡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빈 거리가 될 것이다. 화자는 자연스레 둔 거리가 비었을 때 다시 두 사람만 지날 수 있는 좁을 골목을 원한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시인의 상상력이다. 일상적 언어로 시를 구성하였지만 시인만이 가지는 특유의 상상력을 동반해서 거리를 늘린다. 거리를 늘리는 이유는 뭘까. 아주 가까우면 볼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너무 멀면 보고자 하는 것이 사라진다. 사라지게는 둘 수 없고 아주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인은 거리라는 공간을 늘리거나 좁히면서 화자와 '너'라는 인물 스스로 관계의 거리를 가늠하고 감각하도록 한다. "네가 내 뒤로 숨었으면 좋겠다"라고 고백하는 아주 일상적이고 일상적이라서 따뜻한 장면에 닿을 때까지, 그 장면을 두 인물이 직접 가늠하도록 말이다.

이와 같은 발화, 상상력이 민구의 시를 읽는 재미일 것이다. 어느 포인트를 잡고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는 시가 아닌, 그저 걷다 보니 도착한 마트처럼 편안하지만 주변 곳곳에 무언가가 많은 듯한 것이 민구의 시이다. 독자인 우리는 그것을 보고 그걸 생각하며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두고 산책을 하면 될 일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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