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로하의 태명은 쌀모니였는데, 주위 사람들로부터 독특한 태명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무슨 뜻인지 질문도 꽤 받았다. 여기엔 또 그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으니...
그러니까 사실 우리 부부는 딩크에 가까웠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뭔가 우리 부부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 같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영 없었던 건 아니다.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를 계속 '우리 애기'라고 불렀다.
이런 말 그렇지만 이게 무슨 로맨틱한 느낌이 아니라 그냥 진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애가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조금만 힘들면 징징 거리는 게 정말 영판 7살 아이였던 것이다.
키 155cm짜리의 애기가 엄마가 된다는 게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아내는 나를 철없는 사고뭉치라고 보았다. 그저 매일 술이나 마시면서 제 한 몸뚱이 편한 게 제일인 사람이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로선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우리 부부사이는 거의 파탄에 가까웠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서로 꽤 다정하고, 유쾌하고, 사랑하면서 결혼 생활을 즐겼다.
파울로 코엘료가 그랬던가? 이 여자와 결혼하기 전에 이 여자와 평생 대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고.
아닌 게 아니라 나와 아내는 같이 있으면 온 종일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깔깔거릴 수 있었다.
매년 결혼기념일인 10월 5일에 맞춰 일주일에서 이주일간 여행을 다니고, 휴일이면 하루종일 드러누워 넷플릭스를 함께 보다가, 밤이면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일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다.
물론 서로 너는 나이만 많지 애구나~~~ 너는 여전히 철이 없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우리 관계에 별 악영향을 미치진 않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삶에 그다지 결핍이 없었다. 그러니 아이를 갖고 싶다거나, 가져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가끔 엄마나 장모님이 아이에 대해 넌지시 물어올 때도 우리는 늘 딱 잘라 말했다.
우리 인생에 아이는 없다. 그냥 우리 둘이 사랑많이 하고, 재미있게 살겠다.
물론 섭섭해 하셨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을테니
그런데, 정유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생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이 찾아오고 말았으니...
2022년 12월 9일, 약속이 있어서 친구랑 술을 겁나 먹고,
집으로 가려던 길이었는데, 아내가 배고프다며 초밥을 사오라고 시켰다.
나는 친구네 동네에서 연어초밥을 포장한 다음 친구네 아파트 벤치에서 잠들어버렸다....;;;
(아내가 나를 철없는 사고뭉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딱히 근거없는 비난은 아니라고, 늘 생각하는 바다.)
여튼 그리하여 아내가 그 새벽에 나를 데릴러오고, 그 와중에 집에와서 술이 좀 깬다음 연어 초밥을 함께 먹었는데 갑자기 내가 미쳐서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그날 결국 예기치 않게 폭풍 ㅅㅅ를 하게되었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연애 3년차에 결혼 4년 차여서 우리는 거의 섹스리스에 가까웠는데 그날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다 그럴려고 그랬던가 싶고 그렇다. 심지어 아내는 다음 날 대체 그 연어에 뭘 넣은게 아니냐며 성분을 의심했을 정도였다니까.
그로부터 한달 뒤 그녀는 임신을 했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기쁨이나 반가움보다 약간의 충격과 공포, 대체 그날 나는 왜 연어초밥을 처먹었던가 하는 자책과 후회의 시간이 지난 다음, 우리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부터 태명짓기에 고심했는데 처음엔 개인적으로 2022년을 상징하는 사자성어로 사필귀정을 꼽은터라 사필이나 귀정이로 하자고 했는데, 아내가 사필이나 귀정이를 태명으로 할거면 애를 안낳겠다고 해서 무산되었다가, 연어를 먹고 만들었으니 '연', '연이', '연아' 등등이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너무 평범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연아는 곧 김연아라는 공식아닌 공식도 있는 터가 좀 그랬다.
그러다 며칠 뒤에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태몽인가 싶다며 내용인즉슨 넓은 밭에 쌀알이 가득 펼쳐져 있는데, 조금 걷다보니 복숭아나무가 있어서 탐스러운 복숭아를 하나 땄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연어의 영어인 살몬salmon + 쌀을 합쳐 쌀모니라는 태명을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연이 복잡하고 조금은 19금스러워서 딱히 누가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애매했었는데, 브런치에 그 사연과 과정을 기록해두었으니, 이제 시간이 지나도 까먹진 않겠다.
덧1 : 나중에 양가 부모님들께 태명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는 살몬이라고 하고, 교회다니는 장모님은 샬롬이라고 하는 둥, 결국 본인들 맘대로 부르는 바람에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가 되었다는 후문.
덧2 : 아이가 태어나고 예전에 그 친구랑 그 초밥집을 다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모듬 초밥을 시켜놓고 소주를 먹다가 모든 초밥을 다 맛보고 싶어 가위를 달라고 했더니 주인장께서 본인 나름대로는 최적의 크기와 밥양을 맞춰 놓은거라면서 되게 불쾌한 내색을 하면서 마지못해 가위를 주셨다. 그때 '아... 내가 이렇게 장인 정신으로 초밥을 만드는 식당의 음식을 먹고 아이를 제작했구나' 싶어서 솔직히 좀 감동했다.
나갈 때 "제가 작년에 이 집에서 만든 연어초밥을 먹고 아이를 제작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무사히 세상에 나와서 물색없이 건강하게 먹고 자고 싸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뭔가 수줍어서 못했다. 영원히 하지 말지, 언젠가 다음에 다시 가면 말할지는 여전히 고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