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저자 김성경 교수
내 할아버지는 북에서 오셨다. 대학 시절 할아버지를 모시고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절경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가끔 웃기도 하던 그들은 우리가 무찔러야 하는 괴뢰 공산당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종종 옛날 사진을 보여주며 어릴 때 이야기를 하셨다. 사진 속의 어린 고모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먼 데서 오는 그리움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나는 조금 아팠다. '저 사람이 내 고모구나. 피라는 것은 이토록 분명하구나'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고모와 내 아버지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언론을 통해 북에서 미사일을 쏘고 무인기를 보냈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때 생각이 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구호는 이제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북한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주적이 되었다. 미사일과 무인기와 통일이라는 구호와 주적이라는 선포 사이에 사람은 없다. 아마 살면서 북한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큰 내 아이에게 북은 점점 더 먼 나라가 될 테고, 북한 사람은 더욱 타자화될 것이다.
김성경 교수의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북한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그간 정치적, 외교적인 차원을 넘어 마음과 감정의 층위에서 북한을 연구하고 조망했던 김성경은 이번 저작을 통해 북조선 여성을 이야기한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50명 이상의 북조선 여성을 인터뷰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산문, 소설, 편지 등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북조선 여성들의 역동적인 삶을 복원해냈다. 김성경은 이번 책에서 사람을 통해 체제를 드러내는 동시에 남한 사회의 모순을 비춘다.
그간 북한은 이 나라의 기득권 세력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온갖 적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한 기존의 시각에 균열을 낸다. 이념과 증오를 거두고 냉정하게 바라보면 남북 관계에 있어 분명한 것 하나는 지금까지 해온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틀과 기존의 방식이 남긴 것이 고작 지금의 긴장과 불안이라면 그건 명백하게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리와 그 무리에 휘둘리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이제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 책은 남북 관계라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북조선과 남한의 삶, 생각보다 많은 것이 연결돼 있다
- 아버지가 군인이셨고, 군부대 안에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보통은 북한에 대해 반감을 갖거나, 이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군인이 되겠다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 같은데 교수님께선 북한 사회와 문화를 공부하고 연구하죠. 어떤 계기가 있을까요?
군인이라는 (아버지의) 직업적 특성상, 분단에 대해 조금 더 많이 노출된 유년 시절을 보낸 것 맞습니다. 하지만 어떤 집단이든 하나의 모습만으로 존재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보수적인 측면이 있지만, 어떤 면에선 분단 문제에 대해 굉장히 열린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이었어요.
사실 유년 시절에도 그랬고,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도 북에 딱히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도 북을 주제로 삼지도 않았고요. 제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건 우연히 북조선에서 내려오신 분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였어요. 이후에 생각해 보니 내가 예전에 남들보다는 좀 더 가깝게 분단을 경험했구나 하고 회고하게 된 것이죠."
-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어떤 책인지 작가가 직접 소개한다면요?
2011년부터 다양한 루트를 통해 북조선 여성들을 만나서 연구해왔어요. 보통은 탈북한 여성들을 통해 소개받는 식인데요. 일본을 비롯해 해외 출장을 갈 때나 조중 접경 지역에서 만나곤 했습니다. 이 작업은 저에게도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북조선 여성들에게 이런 모습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한 사회는 북에 대해 관심이 없고, 통일이나 평화에 대한 인식도 크지 않은데요. 그런 만큼 북조선 사람들의 얼굴을 복원할 수 있다면 어떤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어떻게 알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요.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접근 방식은 하나같이 정치, 경제, 이념 중심적이었어요. 저는 이게 과연 얼마나 효용이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어요. 이런 이성 중심주의의 접근법이 맞는다면 남북 관계가 진척됐어야 했겠죠.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렇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결국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고리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분단이나 북한에 대해 제대로 된 접근이 불가능한 건 아닐까요?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는 그런 생각들을 온전히 묶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왜 여성을 주제로 잡았나요? 만난 분들이 다 여성은 아니었을 텐데요.
북조선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쟁, 식민, 분단, 냉전과 탈냉전, 세계화 등 한반도가 겪어온 역사적 경로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남성들과는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건 남한도 비슷한 측면이 있어요. 한반도의 역사적 궤적을 저희 어머니나 할머니 같은 여성들이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삶, 특히 여성을 통해 체제의 모순과 역사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북조선 여성들의 삶을 보면서 남한에 사는 우리의 삶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드러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이걸 거울 상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북조선과 남한의 사람들의 삶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북조선 여성인 길건실이 딸에게 쓴 편지에 이런 문장들이 있습니다. '죽도록 일을 해도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네가 의무만을 잔뜩 짊어진 채 살기보다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단다', '어찌 당과 국가, 수령님이 나보다, 내 가족보다 중요할 수 있겠니' 예시로 든 문장들은 당이나 수령님 같은 워딩만 조금 바꾸면 남한 사회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실제로 북조선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런 내용들이 많습니다. 사회주의를 믿어서 열심히 일했는데 내 자식들은 밥도 못 먹더라,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결국 남한에 내려와 있다는 얘기들이죠.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고, 치열하게 일했지만 정작 삶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본인은 어쩔 수 없지만 내 자식만큼은 나처럼 살지 않길, 좀 편한 삶을 살길 바라는 면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나라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 노동하지만 가난은 계속되고 가진 사람들은 계속 잘 먹고 잘 사는 공고한 구조 속에 있다는 건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서 북조선 여성 중에선 자식에게 과외를 시켰다는 분도 있고, 예전에는 중국어를 시켰지만 영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영어를 시킨다는 분도 있었어요. 저는 책을 통해서 그런 여성들의 의식변화, 어떤 새로운 시도들에 대해서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런 각자의 자리에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지금 우리 세대의 여성들이 조금 더 나은 상황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말이죠."
- 현재 남한의 일반 대중들이 북한에 대해 갖는 생각은 대략 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무찔러야 하는 우리의 적 아니면 헐벗고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 하지만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의지와 좌절 같은 복합적인 감정과 다양한 삶의 궤적이 가지런히 담겨 있습니다. 여기엔 저자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우선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책은 일반적인 사회과학 도서와는 다르게 소설이나 에세이 형식을 차용하기도 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사실을 기반으로 재구성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바탕은 인터뷰나 증언입니다. 그들에겐 흑백으로 보여지지 않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말이에요."
- 이 질문 자체가 저의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동시에 저의 편견이기도 했습니다. (웃음) 어쩌면 우리 모두의 편견이기도 하죠.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저는 필드 노트에 못 먹고, 못 살고, 교육을 못 받았을 거라고 쓴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전반적으로 힘들게 사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런 모습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부분도 있고, 아주 솔직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해요. 그런 다양한 모습들이 있는데 우리가 보는 건 정해져 있습니다.
이게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첫 출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조선 여성들은 이렇다는 어떤 고정관념을 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의도했냐고 물어본다면, 의도하지 않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제가 만난 분들이 그랬으니까요."
다른 방식의 사유가 '분단 패러다임' 깰 수 있다
- 책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이 책에 순영, 정희, 그리고 저희 시어머니에 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요. 세 분이 연세도 비슷하시고, 다 중국에서 태어나셨어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에서 태어난 세 명의 여성들이죠. 하지만 누구는 자신의 삶을 '내가 예전엔 자랑스러운 노동당원이었어, 북에서 어깨 펴고 살았었지' 하고 회상합니다.
어떤 분은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을 놓지 못하셨어요.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끝끝내 희생하는 삶을 살았어요. 또 어떤 분은 일생 동안 과거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만 했고요. 결국 비슷한 태생을 가진 세 분의 삶이 해방과 전쟁과 분단을 경험하면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을 우리의 주적이라고 하고, 저 나라의 통치자는 우리를 향해 무인기를 보내고 미사일을 쏩니다. 이런 걸 보면 현 정권의 대북 정책에 관한 옳고 그름을 떠나 북한과의 관계는 결국 정치적, 외교적으로만 풀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만이 가진 분명한 가치와 의미가 있지만, 교수님의 연구나 작업 방식이 남북 관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보면 결국 '사소한 각주' 같은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런 지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주의적이고 탈 식민지적인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남북 관계를 정치나 구조적인 부분 혹은 국가 단위로만 접근하는 것이 남성 중심적이고, 주류적인 시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남과 북이라는 두 개의 국가, 국제 관계, 전쟁 같은 것만 존재하지요.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이제 전부인지 묻고 싶어요. 어쩌면 여기엔 정치와 국가와 전쟁과 이념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을 사소하게 생각하게 하는 힘이나 권력이 작동하는 건 아닐까요? 만약 이런 주류 담론이 정말로 유용했다면 지금 남북 관계가 훨씬 좋아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실상은 어때요? 지금까지도 분단은 너무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했던 방식으로 접근하고 주류적인 시각을 해체해야만 가능한 건 아닐까요?
저는 북조선 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는 작업을 비롯해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적인 역량을 키워내고 분단 패러다임을 깨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분단과 통일에 관심이 없어요. 이런 방식을 계속 유지한다면 우리는 계속 분단된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국가의 문제라고 여기고 국가가 알아서 하는 방식만을 계속 고집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분단으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은 사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