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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곡리 신상마을에서의 120일의 기록

-비대면 시대의 문학

   1.

  해가 떠오르면 일제히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가을 새벽의 이슬을 받아내던 잡풀부터 시작해 제 키를 한껏 치켜세운 담벼락은 물론이거니와 툇마루마저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 펴느라 삐걱거린다. 대숲에서 날아오른 까치와 물까치를 비롯한 새들도 이때부터 서로 정담을 나누며 시끄러워진다. 이때쯤 소설가 K의 방문이 활짝 열리고 그의 방에 햇살이 우르르 뛰어 들어가는 소리로 아침이 시작된다.

  100여 년이 넘었다는 한옥은 외풍의 서늘함이 도처에 널렸다. 겨울을 앞당기는 비가 내리거나 서리가 소리 없이 마당을 거닐기라도 한다면 한기가 서둘러 등줄기에 올랐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두텁게 무장을 하고 추위에 움츠러들기도 했으나 옴팡지게 한옥 가득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몸도 마음도 뜨뜻하게 뎁혀지기 마련.     

  주곡리 신상마을. 정확하게 120일 조금 넘게 등을 누이고 글을 읽었다. 글을 읽고 또 다른 글을 썼으며 이 생각이 저 생각으로, 저 생각이 그 생각으로 또 그 생각이 다시 이 생각으로 넘나들었다. 어떤 날은 오지게 놀기만 했고 지독한 한파가 온 날에는 아랫목에서 나오지 못한 채 꼼짝도 못 했다. 마을 밖은 유행 중인 바이러스 질환이 풍문처럼 떠돌았고 마을 안은 폐가에서 뛰어놀 법한 바람과 햇살과 새와 고양이가 마음껏 뛰놀았다. 마을 입구엔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늠름하면서 고풍스럽게 늙어가고 마을 감나무들은 처연하게 붉은 점들을 빼곡이 천장 구석구석 찍어놓고 있었다.      

  120일 동안 나와 소설가 K는 잡풀이었고 담벼락이었고 툇마루였고 바람이었으며 때로는 팽나무와 느티나무였다. 때때로 새가 되기도 했고 고양이가 되어 인적 없는 곳만 숨어들기도 했다. 주곡리 신상마을 120일의 기록을 남긴다.     



  2.

  코로나 무르익기 전, 십여 명의 작가들이 모였다. 코로나로 인한 안부며 사회상이며 마스크의 갑갑함으로 술안주를 삼으며 왁자지껄했다. 뭐 여기까지야 뻔한 이야기일 것이고 한참 취기에 버무려져 시인 M과 나는 선배를 향한 장난기로 역모 아닌 역모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소설가 K의 입에서 나지막이 모임의 공지 아닌 공지가 짤막하게 흘러나왔다. 집이 아닌 타지에서의 짧은 생활에 대해. 문학적 과잉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소설가 K의 말소리만 들렸다. 아파트에 갇힌 채 혼자 말하고 혼자 웃고 혼자 마시는 그 지긋지긋함을 잠시나마 떨칠 수 있다니. 밥벌이에 대한 안위도 없었다. 그냥 지긋지긋한 비대면 시대의 아파트가 아니면 된다는 생각. K에게 어디냐고 혹은 어떤 연유에서냐고도 묻지 않았다. 매가 쥐를 낚을 때처럼 물고기가 미끼를 채갈 때처럼 순식간이었다. 그리고선 서너 달이 흘렀다.     

  

  K는 유달리 조용하다. 여럿이 있는 술자리에선 특히 그러하다. 이이 그이 저이의 농 섞인 말을 들으며 수줍게 웃기만 한다. 먼저 무엇을 하자고도 하지 않는다. 알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배시시 웃거나 조용히 침묵에 쌓여있다. 누가 말이라도 건네면 단답형의 말을 던진다. K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외국에서 꽤 오랜만에 돌아온 그와 인사를 나눌 때도 말이 없었다. 그의 이름과 그의 성격에 대해서도 다른 이가 전했을 뿐이었다. 그는 부끄럽게 웃으며 눈인사만 건넸다. 그와 반대로 술자리에서의 나는 수다스럽다. 익살스런 농과 말장난 그리고 웃음이 크다. 진중한 이야기가 오갈 때도 나는 어떤 장난을 칠까 골똘히 생각한다. 물론 때와 장소는 가리지만 때때로 도가 지나칠 때도 있는 법. 나와 K는 상반된 됨됨이를 가졌다.

  그런 그에게서 서너 달이 지나고 전화가 왔다. 나지막이 “가지?” 이 엄중한 코로나 시대에 저 간단한 물음이라니. 전화를 끊고 나는 한참 동안 K의 웃음이 생각났다. 그리고 다음 날 대충 짐을 싸 난생처음 주곡리라는 곳으로 등을 누이러 갔다.

물론 이런 형태의 셋방살이를 해본 적이 있다. 선배이자 스승인 시인 A의 작업실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한 달 혹은 두 달의 시골 생활. 시인 A의 작업실에는 그 흔한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으며 인터넷도 없었다. 오로지 책과 가져간 노트북만이 전부였다. 나는 그곳에서 책만 탐독했고 할 일이 없어 문자와 문장으로 놀았었다. 글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유토피아, 그게 십 년 전쯤의 일이었다. 나는 또 다른 유토피아로 떠났다.     



  3. 

120여 일을 머물렀던 신상리 한옥

  처음 대면한 주곡리 한옥은 낮지만 웅크린 모습이 아닌 당당한 기품이 묻어나왔다. 까만 지붕은 긴 머리를 출렁이며 윤기가 흘렀고 서까래와 기둥은 원목의 빛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백여 년의 시간을 나뭇결에 새겨놓고 있었다. 그뿐만은 아니었다. 너른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건 햇빛이었다. 가을이었으나 볕이 출렁이는 마당가는 뙤약볕이 가부좌를 튼 채 미동도 없었다. 그 덕에 시월 주곡리의 낮은 한가로웠고 푸르렀다. 이따금 파리의 날갯짓 소리가 훼방을 놓았으나 붉은 손바닥을 지닌 파리채가 있지 않던가. 

  주곡리 신상길 OO-X. 하루 먼저 입성한 K는 오래된 전통가옥의 면면을 들려주고 보여주었다. 새로 단장한 부엌과 내가 묵을 방과 K의 방,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마루방, 측면에 위치한 쪽방까지. 전통가옥의 숨은 속살을 더할 나위 없이 손바닥에 아로새기고 눈으로 각인시켰다. 숨은 공간들이 도둑고양이 마냥 느닷없이 튀어나오기도 했고 예상할 수 없는 곳에 감춰진 공간이 아픈 사연을 담고 있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쪽방에 또 다른 방이 숨어 있었다. 총칼의 서슬 시퍼런 6.25 시절, 마을 청년들이 한 사람도 못 들어가는 그 방에 숨어 북의 징집을 피했단다. 지금은 입구마저 막힌 공간. 주곡리 신상길 전통 한옥 귀퉁이엔 아픈 이야기가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문제는 부엌살림이었다. 세탁기도 식탁도 하다못해 싱크대도 구비되지 않았다. 오로지 당당한 체구 지닌 집만 우리를 반겼다. 물론 며칠 뒤 구비되긴 했지만 험난하고 험난한 끼니 해결이 최우선이지 않던가.     

  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시작은 내로라하는 이 땅의 도사들이다. 도를 닦는 험난한 과정에 대해 설파하지 않던가. 그 험난한 과정 중 으뜸은 격파도 아니고 축지법도 아닌 식사였다. 도를 닦을만 하면 때가 오고 때에 맞춰 밥 짓고 설거지하고. 내로라하는 도사들의 푸념 아닌 푸념이 소설가 K와 내게도 닥친 문제였다. 뭐 그 덕에 느는 것은 솜씨지 않던가. 시와 소설에 함몰하듯 음식에 함몰하면 실력은 느는 법. 비법은 함몰도 아니고 몰입도 아닌 미원과 소고기 다시다였다. 미원과 소고기 다시다는 엄마의 손맛을 고스란히 재현할 때도 있다.

 

    

  4. 

  여장을 푼 다음 날 K와 나는 마을이 환히 보이는 건너편 언덕으로 향했다. 가을걷이로 붉은 밭의 속살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는 언덕에서는 주곡리 신상마을의 면면을 훑어볼 수 있었다. 주곡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 역시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오목한 언덕에 위치한 주곡리는 마치 거미의 형국을 닮아 있었다. 거미줄을 튼튼히 친 거미골의 형상. 그리하여 ‘거미(무)실’ 또는 ‘거미 蛛’를 써 ‘주곡(蛛谷)’이라 하지 않던가. 또한 고흥유씨의 집성촌으로 시작하여 주곡리는 여전히 고흥유씨 집성촌의 면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거주하는 집 역시 유씨 가문의 집.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 보면 거미골의 형상인 주곡리

  거미의 몸통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곡정사에도 들렀다. 주곡리에서 태어난 근세 유학자 현곡 유영선(1893~1961) 선생에 대해 K는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었고 그와 더불어 근세의 조선과 일제강점기의 암울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K의 이야기보따리는 시시때때로 풀어헤쳐져 이야기를 짜 집고 역사의 귀퉁이에 숨은 것들을 환하게 밝혔다.     

  하루 먼저 들어온 K는 마을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을 맞이했다고 했다. 코로나 시대의 암울한 이면, 어르신들은 외부인인 우리로 인해 감염의 위험성이 높아진 것은 아닌지 혹은 조용한 마을에 다수의 방문자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고 한다. 물론 120여 일의 생활 속에서 방문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더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외지인인 우리로 인하여 마을 어르신들에게 누가 될 일은 없어야 했으므로. 거기에 더해 K와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유행성 질환의 시대에 적합한 면모를 나와 K는 지니고 있었다.      

  여튼 신상마을에서 K와 나의 일상은 지루할 만치 반복이었다. 삼시세끼 밥을 먹을 때와 종종 마당가에 나와 오지게 푸른 볕을 맞이할 때 그리고 끽연의 맛을 음미할 때 빼곤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 맞다. 웅크린 밤을 비집고 들어가 음주를 즐길 때도 역시 얼굴을 마주했다.     



  5. 

  30여 년을 혼자 살아온 덕에 내가 요리를 담당하였고 K는 정리 정돈과 함께 쓰레기와 냉장고를 담당했다. 제비뽑기 혹은 가위바위보 따위는 없었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주곡리 신상마을 한옥에서의 규칙아닌 규칙이었을 뿐. 허나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면 때론 달그락거리지 않던가.

  혼자 산 세월이 긴 탓에 나는 아침 끼니를 일상적으로 거른다. 하지만 반대로 K는 꼬박꼬박 아침을 챙기는 일상을 지녔다. 그로 인해 한 해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하는 아침을 매일 차려야 했다. 또한 혼자 밥술 뜨는 K를 보다못해 더불어 아침을 먹어야만 했다. 한동안 아침을 먹고 또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속을 메스껍게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나는 소주를 즐기고 K는 맥주를 즐겨 마신다. 나는 폭음을 즐기지만 연이틀 마시지 않는 습관을 지닌 데 반해 K는 폭음이 아닌 입가심의 습관을 지녔다. 첫날 나와 K는 폭음했다. 몰랐던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고 농 섞어가며 미래를 기대하기도 했다. 해박한 K의 이야기가 유쾌한 소설처럼 서사적이었고 나의 추임새와 놀라움의 감탄이 술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이전에 내가 알던 K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한 술자리에서의 K가 아닌 일대일로 마시는 K는 입심이 강했다. 술자리에서 소리 없이 술을 마시던 그이지 않던가. 나는 K의 구성지고 유쾌한 입담에 놀랐고 술이 자꾸 비워져 갔다. 소주 서너 병이 식탁에 쌓였고 맥주캔 예닐곱 개가 바닥에 뒹굴었다. 주곡리 신상마을에서 펼쳐질 날들에 대한 설렘이 술병처럼 가득가득 쌓였다.     

  폭음한 다음 날 저녁, K는 또 맥주를 꺼냈다. 나는 연이틀 마시지 않는 습관을 지녔으므로 술을 거부했다. K의 목울대로 따로 넘어가는 목 넘김이 쓸쓸해 보였다. 그 후로 K를 따라 맥주를 즐겨 마시게 되었고 K는 가끔 소주를 마시기도 했다. 따로 가진 이질감이 서서히 비슷해지기 시작한 즈음도 그때부터이다.     



  6.

  일상적인 시간이 지나갔다. 가을볕 같지 않은 따가운 날들이 지속되었고 이따금 폭우도 쏟아졌다. 폭우가 쏟아질 땐 고양이들이 툇마루 아래에 세 들기도 했고 뒷마당에 놓인 장독대에서는 먼저 튕긴 빗물이 하늘로 치솟기도 했다. 앞집과 뒷집 감나무에서 익기 시작한 풋감들이 선홍빛으로 해와 비를 쟁였고 차 한 대 겨우 드나드는 골목길엔 여전히 새와 바람과 볕과 빗줄기들로 소란스러웠다.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앞에서 인터뷰 중인 K

  팽나무와 느티나무 곁으로 다가가려면 골목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맑은 날엔 낮은 담장 너머에 있는 텃밭들과 오래된 가옥들이 햇살을 고스란히 매달아 말리고 밤엔 달빛의 정취를 곳곳에 새겨놓느라 골목은 바빴다. 달빛 받으며 마실길이라도 나서면 고즈넉했고 식솔이 모인 집을 지날 때면 흥겨운 밥숟갈 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의 낮과 밤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낮엔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이라면 늦은 밤엔 파란빛을 인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별빛과 달빛 그리고 서걱이는 바람 소리로 무장한 채 더욱더 제 덩치를 키워 마치 마을에 범접하지 말라는 으름장을 놓는 듯했다. 나와 K는 오랫동안 기거 중인 골목의 손님이었으므로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걸었고 수백만 광년 떨어진 별처럼 빛을 낮춰야만 했다.     

  고즈넉한 일상을 뒤흔드는 것은 다름 아닌 긴급 재난 문자 알림 소리였다. 비정기적으로 울리는 요란스러움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다반사. 일상생활 속 마스크는 생활화되었지만, 시시때때로 요란하게 울어대는 저 소리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허나 요란스러운 소리도 다 이유가 있는 법. 매섭게 울려댈 때마다 모든 신경은 컴퓨터 자판에서 뛰쳐나와 휴대폰 속 경고문구에 매달렸다. 또한 오전 열 시쯤 불쑥 문 열고 들어오는 불한당처럼 마을 스피커에서 알리는 주의 방송도 일상을 훼방 놓기는 마찬가지. 영역 침범한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울 수도 없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대상이었으니.  

   

이병초 詩 「코스모스」中

  K와 함께 집 꾸미기 계획을 세웠다. 집 외모를 마음껏 꾸며도 된다는 집주인의 당부도 한몫했거니와 따분한 일상을 특별한 일상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지 않던가. 한 장의 기획서를 만들고 나와 K가 속한 단체 작가들의 문구와 문장을 샅샅이 뒤졌다. 물론 집과 어울릴 만한 문장이어야 할 것, 기회가 닿는다면 작가들의 친필로 새겨질 것. 또한 코로나 시대인 만큼 최소한의 인원과 최소의 비용으로 꾸밀 것.

  글씨체와 그림체가 뛰어난 시인 A와 글씨체가 단아한 시인 B 그리고 나와 K. 4인 이상은 집합금지였으므로. 

유강희 시인의 친필

  길고 긴 천으로 툇마루의 바람길을 만들었고 시인이 쓴 문장으로 시인이 시를 새겼다. 시멘트색 담벼락 중 두 칸엔 굵은 글씨의 문장이 들어섰고 부엌 유리창엔 작은 글씨의 문구들이 새겨졌다. 하얀 회벽에도 시구가 새겨져 단아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의 일탈. 때론 컴퓨터가 아닌 문장 문구를 가지고 획을 긋는 놀이는 무한한 상상력을 배가시킨다.      

  난생처음 집을 도화지 삼아 끄적거리고 그림을 그렸다. 획이 잘못 그어지기라도 하면 덧칠해 다시 그려 넣었다. 마당에 놓인 돌확에도 울음 없는 부엉이와 기러기 인형이 앉았고 싸구려 도마에 새겨진 문패에는 주소도 새겨진 채 담벼락에 피었다. 쓰고 지우는 과정 틈틈이 낮술을 즐겼고 딴짓도 즐겼다. 넷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며 웃고 또 웃었다.     

집과 담벼락을 도화지 삼아 획을 긋다



  7. 

  가을이 조금씩 깊어질수록 급격한 날씨 변화가 피부에 사무쳤다. 변덕스런 이곳 날씨를 몸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볕이 환하면 얇은 여름 옷을, 냉기 찬 바람이 볕을 몰아내기라도 하면 두터운 꼬쟁이를 입었다. 폭우가 몰아치거나 폭설이 몰아치면 외풍에 시달려 아랫목 이불 속에만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사람 내음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K와 나는 주곡리 신상마을과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었다.     

삼시세끼 고창 집

  진동규 시인을 찾아가 집의 내력은 물론이고 방송을 탄 옛집에 대한 사연도 들었다. 마당 언덕가에서 캔 바위 속에 그림을 가지고 상상력 가득한 이야기도 나누었고 진동규 시인의 뒷산에 올라 물의 이야기와 흙의 이야기도 들었다. 고창의 맛과 멋에 대해서도 들었고 고창의 내력과 역사 속 인물들을 소개받기도 했다. 그래도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방송된‘삼시세끼’ 속 단아하고 수려한 옛집이었다.

  K와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창의 사내가 궁금하기도 했다. 무작정 전화를 걸고 우리의 사연을 전하고 의례적이고 기약 없는 술 약속과 만남을 기대한다고 했는데 며칠 후 사내가 파란 용달차를 몰고 직접 신상마을로 달려왔다. 시인 김명국과의 첫 조우. 소주와 맥주, 직접 기른 농산물을 들고 찾아온 시인은 말수가 구수했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짓는 농사에 대해 이야기를 전했고 소와 복분자와 고구마 그리고 아내와 아들 어머니에 대해 말했다. 눈코 뜰 새 없음 속에서 시를 건지고 시를 널고 시를 말리는 그는 그 이후로 두어 번 우리를 찾았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같이 등을 뉘었으며 다른 하루는 박카스와 베지밀을 들고 왔었다. 나는 나의 첫 시집을 그에게 전했고 그도 그의 첫 시집을 나와 K에게 전했다. 김명국 시인과 가끔 만나는 시인이 주곡리에 산다는 말도 넌지시 건넸다.      

  우리와 같은 주곡리에 살며 미당 문학관에서 근무 중인 조상호 시인도 만났다. 그는 아랫마을 살고 우린 윗마을에 살았다. 그 역시 말수가 적었으나 논리정연했고 시인의 기품이 물씬 묻어나왔다. 같이 술잔이라도 기울이는 날이면 그는 근래에 쓴 시를 가지고 와 나긋하게 시 낭송을 들려주기도 했으며 척박한 서울에서의 옛 생활도 들려주었다. 같이 아프고 같이 웃었으며 같이 취했다. 그는 나와 K를 위해 종종 고창의 음식들을 포장해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했다. 그런 날에는 달빛 머금은 시가 부엌을 떠돌고 고방을 떠돌았다. 알큰하게 취해 몸을 누이면 밤새도록 시가 흉몽처럼 잠을 깨우기도 부지기수. 마지막 주곡리에서 나올 때도 코로나 시대 속 안위를 당부하는 전화를 하기도 했다.     

  문인들만 만난 것은 아니다. 낭랑한 목소리 지닌 고창문화관광재단 직원들도 만났고 건너편 감나무 집 할머니도 종종 들러 같이 햇볕을 맞기도 했다. 바닷가 근처에 사는 갈매기도 집 근처에서 만났고 높이 뜬 매도 가끔씩 마주칠 때가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툇마루 앉으면 늘상 벌 한 마리가 윙윙대며 주변을 맴돌았다. 벌을 쫓아온 말벌을 보기 좋게 때려잡기도 했다. 아침이면 벌은 여전히 툇마루 근처서 윙윙거릴까?      



  8.

  K는 장편소설 창작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 날은 깨기 힘든 침묵으로 무장했고 어떤 날은 환히 웃으며 농을 건네기도 했다. 그런 K를 바라보며 그의 진척 사항을 지레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산문과 운문 사이를 오갔다. 왜 시는 어려운 거냐는 꽤 많은 이들의 물음에 나는 난생처음 시에 대한 난해함이 숙제였다. 그 숙제를 푸는 것은 산문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어느 날은 산문을 어느 날은 운문을 읊어댔다. 줏대 없는 시인 혹은 줏대 없는 산문가? 여튼 경계 없이 넘나들었고 시 같은 산문, 산문스러운 시, 그게 가장 큰 숙제이기도 했다.

  K와 달큰한 술자리 가진 날에는 술의 기운에 일찍 잠들었다. 그리고 늘상 새벽 요의에 눌려 기상했다. 귀찮은 날에는 방문을 열고 뒷마당에서 일을 보기도 했고 별을 볼 요량이라도 생기면 앞마당으로 나가기도 했다. 일 마치고 K의 방을 바라보면 촉 낮은 불이 켠 듯 만 듯 혹은 보일락 말락 켜져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도 질세라 새벽 세수를 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새벽 고요 속에서 울리는 자판 소리는 경쾌하거나 기괴하다. 문장이 곧잘 풀리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거나 경쾌한 타자음이 귓속을 마구 뛰놀았다. 하지만 답답한 문장이 올라서거나 문구마저 더딘 날에는 기괴하도록 느리고 불규칙적인 타자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뱉은 한숨 소리에 또 다른 한숨이 따라 나오면 방문을 활짝 열고선 추위를 들이기도 했고 새벽 서리를 맞으며 골목을 배회하기도 했다.     

신상리 한옥의 밤_조명을 끄면 방안의 불빛이 남실거린다

  원고가 변비처럼 지독하게 막힌 날에는 K와 나는 고창의 숨은 곳곳을 떠돌기도 했다. 선운사에 들러 고요한 산사 소리에 귀를 맡기기도 했고 개울가에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있다 오기도 했다. 어느 날은 무장읍성에 들러 관아에 앉아 보기도 하고 무장객사 마루결을 쓰다듬기도 했다. 오랫동안 성곽을 걸으며 동학농민운동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당대 민초들의 삶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특히 무장읍성은 나와 K가 운치와 멋에 반해 즐겨찾기도 했지만, 읍성 앞에 있는 백반집의 넉넉함에 매료되어 자주 찾았다. 식당 옆 ‘어름 도장’이라는 뽀얀 간판은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서해안바람공원에 들러 꽁꽁 언 바다와 함께 바닷바람으로 동태체험도 해봤고 학원농장에서 끝없이 펼쳐진 꽃길을 걷기도 했다.

그중 최고는 문수사였다. 나는 왜 선운사만 알았던 걸까? 4개월여의 고창 생활 동안 문수사 단풍과 문수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가파른 길에 고목으로 펼쳐진 길을 처음 만났을 때의 붉은 아찔함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덕에 나와 K는 틈틈이 문수사를 찾았다. 또한 답답하리만치 인자하게 보이는 둥글고 편안한 인상의 문수석상은 또 어떻던가. 

문수사 대웅전과 문수석상

  언젠가 K에게 고창에 대해 물었다. K는 여태껏 먹어본 가장 맛난 땅콩이 고창 땅콩이라 했고 문수사 단풍을 이제야 만났다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문수사 단풍을 아직 만나지 않은 이라면 어서 만나보길. 나와 K의 분한 심정을 당신도 느끼길. 참, 땅콩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언제부턴가 땅콩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9.

  사실 고창에서의 예정된 기간은 한 달이었다. 주곡리 신상마을에 반해 한 달이 두 달이 되었고 두 달이 석 달이 되었다. 그 사이 해를 넘겼고 우리는 넉 달을 꼬박 채우고 구정을 앞둔 어느 날 고창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20년 무수히 만난 폭설

  정리하는 와중에도 바이러스 질환은 기세등등했고 여기저기 뜬소문처럼 횡횡한 말들이 떠다녔다. 나와 K는 짐을 정리하며 더욱 말이 없어졌다. 그동안 불어난 짐들도 말문을 막히게 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든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살면서 이사 다닌 적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사에 익숙하지 않다. 이삿짐을 거의 다 정리했을 무렵 K는 1박 2일의 여행을 제시했다. 집을 떠나는 슬픔, 마을을 등지는 안타까움, 작은 고창 읍내에서 크나큰 도시로 나가야만 하는 아쉬움. 

  나와 K는 짐과 그동안 짓고 부수고 했던 무수한 것들을 쟁여놓고 남해로 떠났다. 남해의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K와 나는 마지막 폭음으로 날을 새웠다.      

2020년 12월 31일 신상마을에서 만난 일출_불기둥이 선명하다



  어쩌면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없었을지도 모를 넉 달의 생활. 폭설에 갇히기도 했고 뜬눈으로 아침을 지켜보는 날도 있었고 무수한 별들과 바람과 자연이 만드는 소리로 뒤척이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푹 잠을 잔 것 같기도 하고 흉몽의 밤이었던 것 같기도 한 120일의 고창 주곡리 신상마을의 생활. 지독하리만치 느렸고 반복적이었고 따분하면서 수런스러웠던 날들. 잘가라 120여 일의 날들아, 잘가라 한 때의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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