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라흐마니노프가 말했다
'길을 따라 걸어가 보아라
주위에 말하지 말고 혼자’
이제 막 걸음을 내디딘 자라나는 아이처럼
또는 군장을 메고 행군을 처음 떠나는 입영 청년처럼
또는 목적지 없이 그저 낯선 세상을 찾아가는 항해처럼
길의 끝을 상상하지 않으며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 고요 속 꽃들의 품에 안기는
그의 달콤한 방랑 이야기는
물 위에 쓴 기도문처럼 의미 없이 흐려진다
온종일 그의 음악을 냉대받은 슬픈 얼굴로
어느 날 라흐마니노프가 말했다
'길을 따라 걸어가 보아라
영원한 설렘을 간직한 채'
길을 끝까지 다 걸으면 나타나는
시든 가로수의 낙엽이 모여드는 곳,
길이 끝나고 길마저 흙으로 돌아가 휴식하는 곳에서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볼 이유가 필요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