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의 섬에서 읽은 섬의 시
-이생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섬의 시인.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는 아름다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시집이다.
이 땅의 무수한 이름없는 풀꽃들처럼
한 사람의 민초가 되어 수많은 섬과 섬 사이를 유랑했고 여전히 유랑하는
시인의 모습과 '무명도'라는 말은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제목인 '무명도'는 그저 '이름 없는'
그저 그런 유명하지 않은 섬을 말할까.
시인의 생애와 한자어의 말풀이 그대로 본다면
사람의 입(이름)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낯설고 호젓한 섬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분별(의식)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
아스라이 떨어져 있다는 말, 인간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았다는 말일 터.
그렇다면 '무명도'는 '무인도'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무명도'는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누구도 아직은 가 보지 못한
'유토피아'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최근의 우리는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고 있지만,
그 풍요로움은 육체를 부풀게 하는 반면 정신(마음)의 가난함은 역설적으로 심화시켜왔다.
자연의 해는 져도 현란한 네온사인은 도무지 저물지 않는
저 문명의 번화한 거리와 무수한 인파 속에서
군중 속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일 이상의 무엇으로 매진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고 갖고 그 무언가에 열심히 탐닉하며 중독된다.
사람들은 많은 타자들 속에서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각종 sns를 켜고
곁에 있기를 바라는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전화를 한다.
그러나 그런 매진과 탐닉과 중독, 정신의 허기를 메우기 위한 노력은
다시 빠르고 바쁜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계속 돌고 돌 뿐.
그럴 때면
단 하루만, 단 일 주일만, 단 한 달만
세파에 치이지 않는, 아무도 나(이름)를 모르는 곳에서
시계의 시간을 제쳐 두고 문명의 옷은 벗은 채
홀로 지내다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
자연의 리듬으로 해가 뜨고 지는
호젓한 섬에서 '뜬 눈으로' 그간 소홀히 대접했던
자신의 내면과 다친 마음들을 응시하고 보듬으며 보내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무명도에서의 삶은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무아의 경지를 말함일까.
아마도 그리운 것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명도'는 '무인도'이자 유토피아의 상징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섬에서 우리는
다시 그리운 것들을 찾아 배를 타고
자신의 일상이 누비던
화려하고 분주하고 번잡한 문명 속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