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섯째 날
아침이었고 엄마와 같이 있다고 믿었지만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 내가 살던 집이었지만, 엄마와 티격태격하던 그 공간이었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엄마는 좀 비장했다.
경수는 문득 엄마를 어설프게 속단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눈이 기능한다고 해서 장님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격이었다. 사실 스스로 무얼 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얘 너 엄마를 보는 눈이 꼭 범인 쳐다보는 형사의 눈이네?”
“엄마는 어디 있는데요?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우리 산책이나 갈까?”
“우리요? 산책을?”
“걱정 말어. 네가 가면 엄마도 가는 거야.”
경수는 차를 타고 나갈까 하다가 집 뒤 야트막한 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을 통과하는 산책로에 들어서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얼굴 보니까 정말 내가 자백이라도 해야 할 분위기다. 얘, 무서운데?”
아침부터 쏟아붓는 칠월 햇볕의 무게에 초록은 휘청 기울어 있었다.
“내게 자백할 거리라도 있나 보네요.”
“자백이 아니라 들려줄 얘기가 있어. 이렇게 넘쳐나는 여름 이야기처럼. 엄마잖아.”
여름이 어떤 이야기로 넘쳐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은 한 점도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넘치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났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거야? 물론 모든 일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그런데 왜 일어났지? 어쨌든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는 거니? 너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 거니?”
“사건은 일어났고 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
엄마가 몰아치기 시작하자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나기는 한 거니? 반드시 일어나서 사건인 거니? 우리 모두는 가능성이야. 가능성이었고 사건과 상관없이 다시 가능성인 거지.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그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엄마는 무슨 일을 한 거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경수는 바위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발아래 끙끙거리는 도심이 펼쳐져 있었다.
“엄마는 이 꼴이 되고 깨달았어. 실상 세계는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세계는 구름처럼 떠도는 가능성과 이에 딸린 해석뿐이야. 그게 세계야. 그러니까 사건이란 이미 해석된 가능성이야.”
“무슨 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내가 달리 해석하면 엄마가 연관된 사건도 변한다는 말이야?”
엄마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일어나기는 한 거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건이야.”
“엄마는 살아 있기는 한 거야. 이게 다 무슨 얘기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경수는 도망가듯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서 오던 길로 방향을 잡았다. 초로의 노인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안경을 썼고 훤칠한 키에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몸도 마음도 구부정해 보였다. 노인이 지나치자 엄마가 물었다.
“혹시 누군지 알아보겠니?”
“내가 알아야 해? 그런 사람이야?”
“네 아버지다.”
경수는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돌아봤다. 수풀과 작은 나무에 싸인 산길 혼자 오롯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한 명의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경수는 흠칫 놀라 다시 서 버리고 말았다. 1년 전에 헤어진 세정이었다. 그러나 세정은 경수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경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신이 가능성과 어울린다면 사건은 생명과 어울려. 그래서 사건은 온전히 살아 있는 이들의 것이잖아. 산다는 일이 사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끓는 기름 같잖니? 그래서 재미도 있지. 그리고 이렇게 사건과 사건 사이를 출렁이며 연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야기야. 사는 일은 이렇게 이야기야. 재미있잖아. 이야기도 현실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사건이 사실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도 진실과는 상관없어. 이야기는 이야기야. 지금 여기서 이야기를 출렁거리게 하는 건 너야.”
엄마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경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슨 최면 같은 일들이, 아니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산길을 올라오는 일군의 건장한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짧게 자른 머리에 어두운색 옷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서로 대화도 없이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올라오는 모양새가 분명 사복형사들이었다. 이 시간에 형사들이 산에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제보를 했고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체포하기 위해서이다. 경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다시 엄마의 목소리였다.
“저들에게는 경수 네가 용의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까지 출렁이게 할 필요는 없잖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그들은 바로 옆을 지나면서 경수를 알아채지 못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경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야트막한 산이라지만 달리기에 길은 거칠었고 또 끝없이 이어졌다.
“먼저 집에 가 있겠니. 엄마는 좀 들를 데가 있어서.”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건조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