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박에 넷
0. 나는 언제 슬픈가
‘나는 언제 슬픈가?’ 문득 내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대답은 여러 갈래였다. 내 안의 어느 나는 ‘오후 4시’라고 했고 다른 나는 ‘배고플 때’라고 했다. 또 다른 나는 수줍은 발 냄새를 만날 때였고 누구는 첼로가 만든 어느 구덩이라고도 했다. 이제 언제라는 말이 단순히 시간의 위치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오후 4시’는 먼 사랑이 기우는 햇빛을 타고 발등에 떨어지는 시간이다. ‘배고플 때’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허기를 만나는 때이다. ‘수줍은 발 냄새’는 어긋난 항아리 뚜껑이 모여 있는 어느 장독대 아래 선 계절이다. ‘어느 구덩이’는 현 위를 미친 듯이 방황하는 손가락의 온기였다. 그러니까 언제라는 말은 여러 상황이 한 점에 모여 만드는 정서의 덩어리이다.
나는 아주 사적인 ‘언제’들을 모아볼 생각이다. 아마도 슬퍼 보이는 ‘언제’들이 될지도 모르지만 슬프다는 짐작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고정관념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언제’들이 모이면 그저 따뜻한 하나의 생이 될 거라는 희미한 기대로 쓴다.
아주 사적인 이 넋두리의 주인공은 엄마이고 제1 조연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각자의 생을 엮어내고 있는 피붙이들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누구의 시각으로 보면 좀 지질한 생들이기도 하지만 이들 또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언제’들의 모임이다. 이 ‘언제’들이 모여 두런거린다.
사실 나는 기억이 좋지 않다. 과거의 기억이라고는 봉인이 해제된 비밀문서처럼 온통 검은 줄로 가려있거나 나머지도 대부분 뭉개진 활자 같다. 나이 든 탓도, 과한 음주 탓도 있을 것이지만 아마도 내 무의식이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머리보다는 몸을 더 사용하며 사는 내 두 동생은 오히려 과거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몇 살 때 아버지께 몇 대 맞았는지까지 정확하게 토해낸다. 이런 탓으로 내 경험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잘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나는 언제 슬픈가?’라는 질문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기억이 좋지 않은 나임에도 내가 써야 한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징검다리 사이 텅 빈 곳을 무의식이 상상해 채워 넣었을 수도 있다. 역사이건 허구이건 이나저나 다 하나 이야기라는 핑계로 그저 내딛는다.
1. 엄마와 아버지
엄마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평생 딱 한번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그것 또한 열심히 담배를 피우는 아들들 때문이었다.
엄마는 아들만 넷을 두었다. 언젠가 사주를 보러 갔다가 사주쟁이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신 팔자에 딸은 반쪽도 없네.”
엄마는 딸이 키우고 싶었다. 그렇게 아들 둘을 낳고 딸이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 쌍둥이였다. 단박에 아들만 넷이 된 와중에 나는 둘째다. 엄마는 팔자 탓을 하면서 그렇게 아들 넷을 키웠다. 그리고 그 아들 넷은 모두 성인이 될 즈음 담배를 배웠다. 좋은 일을 습득하는 일도 아니니, 배웠다기보다 그냥 피웠다가 맞다.
버스를 타면 모든 좌석 뒤통수에 접이식 재떨이가 달려있었고 대학 복도에서도 모두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많은 학생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복도로 나오던 야만의 시절이기도 했다. 지하 청량리역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전철이 들어오면 피우던 담배가 아까워 볼이 터지도록 가득 연기를 빨고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전철 안으로 뛰어들던 무지한 청춘들이 있었다. 이때 꽁초를 재떨이 모래 위에 꽂고 사라지는 청춘들 뒤에서 그 모래 위에서 전사하기 전의 담배를 노리던 더러운 청춘들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긴 담배꽁초를 모래에서 잽싸게 뽑아 불을 붙이는 수고도 없이 느긋하게 피우기도 했다. 이런 어이없는 시절이 흡연의 핑계가 되기도 했지만 그때도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버지만 해도 1960년대에, 남들은 담배를 배우는 군에서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스스로 담배를 피울 형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다. 그해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년째 되던 해였다. 아들 넷 모두 담배를 끊었다. 이제야.
아버지는 전라북도 김제, 기와를 찍어 생계를 이어가던 집안의 8남매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왜 가난하게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60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체구에 누가 그리 무거운 삶을 얹었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엄마는 부농은 아니지만 농번기에 머슴을 쓸 정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김제에서 멀지 않은 만경 어느 시골이었다. 역시 8남매 중 둘째이자 큰딸이었다. 국민학교는 얼마간 다니셨다고 했다. 딸들은 잘 가르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겨우 한글만 깨친 엄마는 어릴 때부터 살림을 했다. 외할아버지의 정책에 반대해 기를 쓰고 고등학교까지 다닌 이모도 있다. 그 이모는 일찍 결혼을 해 친정에서 탈출하고는 남편을 가르쳐서 목사로 만들었고 본인도 대학을 다녀 스스로도 목사가 되었다. 좀 지독한 이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