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병인 추적기
2. 오백 원
이 이야기는 어쩌면 엄마가 왜 폐암에 걸렸는지 추적하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니 만경의 어느 시골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하고 군에 가셨다. 엄마는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시작했고 좀 지독한 시집살이를 하셨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욕할 생각은 없지만 엄마의 시집살이는 좀 지독했다고 했다.
이쯤에서 누군가 묻는다. 너는 할머니와 엄마 중에 누구 편이야? 그렇다면 당연히 엄마 편이다. 뭐 특별히 이유를 댈 필요도 없다. 내 입에 밥을 넣어주던 분이니까. 그리고 또 묻는다. 너는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누구 편이냐? 뭐 당연히 엄마 편이다. 눈물 찔끔 나게 아픈 손맛으로 내 등짝을 후려치던 분이 엄마이기는 했지만 내 입에 밥을 넣어주던 분이니까.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원래 끝까지 좁히지 못하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사실 모든 아이들에게 엄마는 세상의 모든 갑이자 세상의 모든 을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버지는 처가에서, 그러니까 지독하게 가난한 당신 집안 대신 나의 외할머니에게 오백 원을 빌려 먼저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다. 먼저 서울에 간 아버지는 처가 친척이 운영하던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이후 같은 사장의 소유인 자동차 정비공장으로 옮긴다. 이 공장은 박정희 시절 청와대 차까지 들어와 수리할 정도로 기술이 있었고 규모도 컸었다. 그러나 예전에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얘기를 간추려보면 취직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맞지 않는 착취였다. 아버지가 일한 버스회사와 정비공장의 사장인 처가 친척분도 좀 지독한 양반이었다. 그 당시에도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는데 운전기사를 혼쭐 내던 사안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들었던 얘기를 한번 옮겨본다.
“야, 니가 타이아 값 낼 건가? 왜 시멘트 포장길로 다니냔 말야? 저짝에 멀쩡한 아스팔트 길 놔두고. 시멘트 길로 다니면 타이아가 얼마나 닳는지 알기나 아나?”
여기서 시멘트 길이라 함은 개통 당시 시멘트로 포장해 나름 화제가 되었던 중부고속도로를 말한다. ‘저짝 아스팔트 길’은 훨씬 먼저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이다.
또 하나 지독한 이야기. 나이 들어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에게 범법전과가 있었다. 교통사고 전과였다. 그즈음 아버지가 일하던 정비공장의 사장 아들이 면허도 없이 몰래 차를 끌고 나가 사람을 치는 사고를 쳤다. 먼 친척인 사장은 시골에서 올라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먼 친척 젊은이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간의 돈과 뜬구름 잡는 약속으로 자신의 아들 대신 범인 역할을 시켰다고 한다. 아버지는 버스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일찌감치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60년도 더 된 일이라 대가가 무엇이었고 얼마 동안 고생했는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을 수 없어, 나는 자세히 알 길 없지만 형은 이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보름 동안 구치소에 있었고 그동안 밤이면 엄마는 조용히 울었다는 사실을. 이런 일이 흔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서울에 올라와 몇 년 동안 고생한 결과 아버지는 엄마와 큰아들을 서울로 데려온다. 그러니까 엄마와 나보다 다섯 살 위인 형은 그렇게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엄마는 나를 낳을 예정이었다.
3. 연탄가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나 이전에 또 한 사람이 엄마 태 안에 잠깐 있었다고 했다. 형과 나 사이가 다섯 살 터울이 나는 건 그 사이에 한 생명이 세상 빛을 보기 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연탄가스였다. 그 시절에 흔했던 연탄가스 사고로 엄마는 아이 하나를 뱃속에서 잃었다.
당시 난방을 하는 방식 때문에 연탄가스 사고는 흔했다. 서울만 해도 대부분 아궁이에 연탄을 넣고 쇠로 만든 뚜껑을 씌워 연탄이 타면서 내어놓는 열기를 직접 온돌 바닥 아래로 보내는 형식이었다. 시골에 있는 옛집들과 근본적으로 구조는 같았다. 다만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나무를 땠지만 도시에서는 아궁이를 작게 줄이고 그 안에 연탄을 땠다. 문제는 구들장 아래로 연탄의 열기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연탄이 타면서 내놓는 일산화탄소도 같이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돌을 깔고 그 사이를 시멘트로 메운 방바닥은 고르게 수평이 맞고 따듯했지만 문제는 시멘트가 마르면서 갈라진 틈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 틈으로 일산화탄소가 올라와 잠든 사람들을 천천히 덮쳤다. 예민한 사람들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잠에서 깨기도 했지만 세상모르고 잠든 사람들 중에 그렇게 세상과 이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이면 저녁 뉴스 시간에 거의 매일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접할 수 있었고 대형병원들은 TV에 광고로 연탄가스 가스중독사고를 치료하는 대형 압축 산소탱크를 자랑하고는 했다. 이후 연탄으로 물을 데워 뜨거운 물로 난방을 하는 연탄보일러로 바뀌면서 중독 사고는 많이 사라졌지만, 엄마는 그렇게 아이 하나를 다른 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꼭 밤에만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들 넷을 씻기는 일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여름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수돗물만 채워놓으면 끝이었다. 사내아이들
은 물만 보면 한 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고 서로에게 물을 뿌리고 먹이며, 스스로 물을 삼키며 끝없이 놀았다. 그땐 그 작은 물속이 빤스도 필요 없는 바다였다. 그 찬 바다에서 놀다 보면 살이 퉁퉁 불어 살짝 손만 대도 때가 밧줄 굵기로 밀려 떨어졌다. 그렇게 두어 시간, 체온이 떨어져 입술이 퍼렇게 질리면 알아서 물에서 나왔고 수건으로 물만 닦아놓으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이제 밥만 해놓으면 길고 긴 여름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