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
11. 집 이야기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화장실과 붙어있는 작은 장독대가 보인다. 빨랫줄 아래 열하고도 여남은 개 항아리가 계단에 선 합창단처럼 내림차순으로, 나름 불룩한 배를 내밀고 서있었다. 그 뒤로는 아주 높은 담이 보인다. 지대가 높은 뒷집과의 경계이다. 뒷집은 오래된 이층 집으로, 우리 집 등 뒤쪽 골목으로 대문이 나 있었고 그 골목을 꽉 채우는 자가용도 있었던, 좀 부잣집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집 아주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우리 집을 몹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내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지 않는다. 그냥 마당 한가운데 하수도에 대고 오줌을 갈긴다. 순서대로 싸는 경우도 있고 서로에게 튀는 액체를 피해 가며 두셋이 동시에 갈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나면 바가지로 물을 퍼 대략 씻겨내는 정도의 매너는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등짝에 손바닥으로 행한 교육의 결과이다. 이렇게 덜 떠진 눈을 비비며 오줌을 싸는 아침, 고개를 들어 좁은 하늘을 우러르다가 뒷집 이층 베란다에 나와 있는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어린 사내아이는 꺼내놓은 신체의 일부에 대한 민망함과 동시에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에 시달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슬쩍 시선만 피했던 것 같다. 엄마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핑계로 자신을 달래며.
그 집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아주 다디단 대봉감이었는데 그 가지 일부가 담을 넘어 우리 집에 걸치고 있었다. 가을이면 감잎이 떨어져 우리 집에 쌓였고 익은 감 몇 개가 떨어지기도 했다. 떨어진 것은 대부분 덜 누른 빈대떡 모양으로 터져있었다. 엄마는 혼잣말을 하며 부지런히 감잎을 쓸어내 치우다가 몇 떨어진 감을 주워 많이 터진 것은 당신이 드시기도 하고 두었다가 식후에 아버지 앞에 내놓기도 했을 것이다. 흙을 찾아보기 어려운 서울 시멘트 밭에서 자란 감나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감은 크고 달았다. 감나무 가지는 수십 개이고 가을이면 수백 개의 감이 열렸다. 아마 엄마는 넘어온 가지 끝에 달린 감 중에 하나둘 손에 닿는 것을 떨어지기 전에 땄을 것이다. 시골에서는 뭐든 나누어 먹는 일이 생활이었고 감은 거의 따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것이 대부분일 정도로 흔했다.
이런 일을 증거 삼아 뒷집 아주머니는 엄마를 향해 도둑까지 운운하며 드잡이를 걸었고 결국 작지 않은 다툼으로 이어졌다. 친하지는 않아도 크게 문제가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 일을 계기도 앞뒷집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이후 우리 집 안으로 넘어온 감들을 채 익기도 전에 긴 장대를 이용해 따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즈음 아들들은 거의 밖에서 생활하고 느지감치 귀가하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단단히 화가 난 엄마의 육성으로 상황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후 뭐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뒷집과 다시 큰 다툼이 있었던 기억도 없다. 그 일이 있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인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뒷집은 우리 집이 되었다. 장독대 옆 부분 담장을 허물고 시멘트 계단으로 두 집이 이어졌다. 감나무도 우리가 올라가 마음껏 따먹고 기분대로 가지치기할 수 있는 우리 가족이 되었다. 모든 감을 완벽하게 따기 위해 끝에 가위가 달린 최첨단 장대를 샀고 가위 아래 잠자리채 머리를 달아 감이 떨어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도록 혁신적인 개조도 해냈다.
아버지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서울에 올라와 청년시절부터 일하던 정비공장에서 부품실을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형이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내가 군에 간 후 얼마 안 돼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십수 년 후, 아버지는 뒷집을 전격 인수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우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초창기 적대적 M&A의 한 예가 아닐까 짐작한다.
이 이야기는 관계자들(우리 가족)에게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시에는 분명히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엄마에게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매일 시끄러운 집안이라고 우리 가족과 집을 좀 무시하던 뒷집을 인수했으니 엄마가 느꼈을 심리적 해방감과 승리감의 부피를 집작키 어렵다.
아, 여기서 ‘시끄럽다’는 말은 가족관계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시끄러운 상황을 뜻한다. 아들 넷이 사각의 이불을 링으로 프로레슬링 태그매치를 날마다 실연하고 리얼 권투경기가 수시로 열리는 데다가 다음 순간 싸우고 소리치며 도망과 추격이 벌어지고 쌓아놓은 물건이 무너지고, 이어 엄마의 고성이 폭발하는 액션 영화적 상황을 조금 높은 지대에서 강제로 들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게 이렇게 역지사지하는 정서적 아량과 혜량이 생긴 때는 사실 최근이다.
뒷집이 우리 집이 되었다는 사실은 가족에게는 행복한 과정이었으나 동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소음의 진원지가 조금 높은 곳으로 이동해 전파 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여러 상황으로 보자면 사는 일은 해피엔딩을 운운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에는 동화책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일은 없다.
사는 일에는 완전한 해피엔딩도 없고 불행하기만 한 결말도 없다. 죽음만 해도 그렇다. 생이 행복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 끝은 슬픔으로 다가올 터이고 한 생이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끝이라도 있어 다행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는 일은 어렵고 힘든 시간이 여기저기 박혀있고 그 사이 즐거운 시절 몇이 교차하는 길지 않은 과정일 뿐이다.
그 이층 집이 우리 집이 되고 나서 감나무가 베푸는 감을 우리 손으로 따 친한 사람들과 나눠먹기도 했으며, 냉동실에 얼려 다음 해 여름에 별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십여 년 후, 그러니까 엄마 돌아가시고 얼마 후 재개발이 진행되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처음 마련한 아랫집과 합병한 윗집 모두 헐려 아파트 단지를 싸고도는 길이 되었다. 감나무는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옛 동네에는 벌떡벌떡 일어선 아파트들만이 여럿 생의 기억을 가로막고 서있다.
요즘은 포털사이트가 생생하게 제공하는 지도의 길거리 광경으로 가끔 동네를 돌아본다. 재개발에서 제외되어 크게 변하지 않은, 너무나도 눈에 익은 앞 동네가 없으면 내가 살았던 동네라고 확인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번은 우리나라 포털 서비스가 아닌 국제적인 지도 서비스로 동네에 들렀다. 그 사이트에서는 헐리기 직전과 헐린 직후 동네가 뒤섞여 보였다. 업데이트가 늦은 탓이었다. 거리는 7~8년 전의 모습이었고 당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그 길에는 동네 어른들의 놀이터인 목재소로 마실 나가는 아버지가 보일 것 같기도 했고 아들들이 퍼마신 빈 술병을 작은 카트에 싣고 마트로 향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