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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Mar 27. 2021

이야기의 역사

그냥 내가 말하는 내 시 3

 이야기의 역사          

 


 카쿠는 투라를 불렀다

 칭치가 물을 건넜다

 돌아오는 길에 아리는 숲 속에서 예루와 했다

 틴차와 역청은 모르는 사이다

 육리가 마을이 뭐냐고 물었다

 숨이 차오르면 산을 내려간다

 산이 올라온다

 추추가 ‘내려간다’ 뒤에 ‘올라온다’가 있다는 것에 쓸데없이 주목,

 둘이 관계가 있다고 의심했다

 혁녕이 추추를 죽였다

 이 죽임도 추추의 주장과는 아무 상관없다

 반복이 마을에 자주 출몰했다

 왁도는 자꾸 돌라와만 자기 시작했다

 태어나는 투과의 수는 변치 않았지만

 비슷한 모양의 투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모든 행간은 서로 아무 상관없다고 우긴다

 릭탕은 우기는 것도 그전의 무엇과 관계하고 있으므로

 신성한 객체들의 독립 상태를 모욕했다고 소리쳤다

 드디어 마을이 야기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나는 릭탕을 죽이고 부랴부랴 떠났다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에서 (랜덤하우스중앙 2006. 14)               






 이 시는 2006년 발행된 첫 시집의 첫 시이며 1998년, 다섯 편의 등단작 중 하나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는 이 시를 “이 반(反)서사주의는 무연히 존재하는 것들에게서 인과를 발견하고 반복과 상사를 생산해내는 관습적인 시들의 나이브한 서사를 암묵적으로 힐난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문학은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야기는 구조를 갖춘 이야기를 말한다. 인물이 등장하고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 결국 성공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영웅 서사와 함께 이야기에는 몇 가지 틀이 있다. 그래야 이야기로서 사람들은 안도하며 만족해한다. 문학의 장르 중에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시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누구나 아는 소월의 시이다. 여기에서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 내용과 상관없이 민요의 가락에서 가져온 음악성이 두드러진다. 금모래의 이미지가 눈을 간지럽히며 갈잎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는 아버지의 부재를 근거로 여러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강변을 보며 미래의 부동산적 가치를 논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시에서 이야기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다. 물론 이야기 시라는 분류도 있으며 이것이 시대적인 역할도 했다. 이야기를 근거로 한 시는 잘 읽히며 목적한 바를 전달하는데 쉬운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시에서 이야기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이야기는 가장 효과적인 정보전달 방법이다. 바로 포식자에게 잡히지 않고 온전히 생을 이어간 존재가 남긴 신화이다. 이미 잡혀먹은 자는 말이 없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자신이 역경을 헤치며 천수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그 방법을 동료와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이고 이야기성의 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불가에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바로 근본적인 형태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 방법으로 역경을 헤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또한 이것이 대부분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이야기의 역사」는 이야기라는 것을 시의 목소리로 해부해보자는 시도였다. 이 시가 가지는 자체 서사뿐 아니라 ‘야기’를 제외하고는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까지 모두 무의미 그 자체이다. 무의미는 이야기를 죽이는 흉기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체해본 이후 요즘에는 구조를 비틀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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