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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Apr 01. 2021

춤추는 세계

그냥 내가 말하는 내 시 4

 춤추는 세계1          



 욕망의 내용은 주어진 삶이기에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호기심이고 형식은 유전자에 새겨진 음각陰刻이며 목적은 생존이다.     


 욕망이 다양한 양태로 생존에 복무할지언정 ‘좋은 생존’ 따위의 가치판단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삶에 가끔씩 달달한 사탕을 던지는 짓이 욕망이 가진 방법의 전부임을 알아채는 순간은 보통 대부분의 치아가 상하고 나서이다. 그 사탕이 허망을 가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뒷맛이 덮칠 즈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욕망, 슬픔, 좌절과 같이 생을 이루는 많은 요소들은 각각 다른 원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소가 다른 패턴으로 쌓여 만든 것이다. 따라서 생존은 복잡한 구조를 가진 적이 없다. 반면 허망을 고자질하기 위해 태어난 이성은 무기력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설사처럼 예고 없이 변기를 타고 사라지기 일쑤이다.


 욕망이 가진 잔가지들은 그러나 삶을 생이라는 틀 안에 붙잡아두는 끈끈이이기도 하다. 늦가을 녹슨 이파리들 사이를 떠나지 못하는 바람처럼 사랑이라는 잔가지가 그랬다. 이 낡은 애착들 사이를 헤매는 작은 생존들은 스스로 화석으로 남을 낙서라고 예언했기에 허망은 다름 아닌 발각되지 않기로 작정한 화석의 이성이다. 이런 게으름으로 전 우주를 가로지르는 암흑의 배경을, 들끓는 바닥을, 허공에서 몸부림치는 양자적 요동을 무의미의 퇴적층이라 오해한 모두는 이다. 



 -시집 『밍글맹글에서 (파란 2018. 15)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글은 놀라운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그는 한 실험적인 소설에서 새로운 카드게임을 제안한다.

 선술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런데 선술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누구도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남녀노소를 비롯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는 오로지 그림이 그려진 타로카드를 나열함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다른 이들은 그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진행된다. 한 장 한 장 카드가 놓이면서 이야기가 나아가기 시작하지만 모두가 바라보는 이야기는 다르다. 같은 그림의 카드일지라도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 뜻은 달라진다. 또 뒤에 놓이는 카드에 따라서 앞 카드의 뜻이 변화하고 전체적인 맥락 또한 달라진다. 이야기의 맥락이 흔들리면서 변화하면 여기에 영향을 받아 카드의 뜻도 달라진다. 심지어 거꾸로 읽으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카드게임 자체가 우리 삶에 대한 놀라운 상징이다. 우리는 각자 인생을 살고 있으며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흔들림에 영향을 받으며 내 인생의 이야기가 변화하고 순간의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이며 내가 꺼내놓았을지언정 똑같이 공유할 수 없다. 타인은 다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이 시는 3편으로 구성된 연작시이다. 먼저 각진 단어가 등장한다. 주로 사각의 딱딱한 한자어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단어들은 사실 구체적인 이미지나 디테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욕망’이라는 단어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몇 가지 상을 떠올리겠지만 어떤 이야기나 초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런 단어들은 시를 쓰는 일에 있어 사실상 금칙어에 가깝다.     

 이런 헐렁한 단어들이 하나둘 진행되면서 단어는 느슨한 마디가 된다. 그리고 이 마디에 걸려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맥락은 계속 흔들리며 변화한다. 심지어 반대의 뜻으로 뒤집히는 경우도 있다. 시는 이렇게 진행된다.     

 사실 이 시의 내용은 따라가기 쉬운 이야기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자세에 대한 관념적 진술이다. 사각의 헐거운 단어들과 이를 타고 이끌려가는 관념적인 진술. 보통의 시론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만을 골라서 모아놓은, 말하자면 시적 반항의 창고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반항의 발로이자 시가 엔진으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정신의 자유라는 신념이 만나 낳은 부끄러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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