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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Mar 20. 2021

솔레파

그냥 내가 말하는 내 시 2

     

 솔레파               


 내 쓰레빠의 궤적이 언제부턴가, 내 생의 그것이다 기울어진 전봇대가 노래한다 쓰레빠가 찍은 왼 발자국은 허공의 턱수염을 쓰다듬고 오른 발자국은 전봇대를 타고 오르다가 슬쩍 늘어진 현수선을 넘는다 솔레파, 노래를 따라가다 문 연 화장실에 한 남자가 누워 있다 참 시체스럽다,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벌떡 일어난다 그가 내 노래를 신고 있다 생의 자장 안에서 가장 편안하게 늘어진 자세, 다른 신발은 아무렇게 벗어 놓지만 쓰레빠만은 신발장 높은 곳에 고이 모셔 놓는다 노래를 보면 모두 신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니, 분명 태초의 역사를 가진 본능이지만 곰팡이 낀 신발장의 높이만 가져도 생의 현수선은 공유하지 못한다 몸 어디건 거기가 제일 끝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무엇과도 화해하는 자세를 만들면 중력장 안에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다 죽음과 최소 시간 경로, 그 비가역의 경로가 낮게 깔린 구름 발치서 웅얼거린다 노래가 나를 신고 다닌다 솔레파          


-시집 포이톨로기에서 (문학동네 2012. 45               




 찬찬히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솔레파」는 ‘쓰레빠’이다. ‘쓰레빠’라는 일본어 투의 단어는 동네를 떠도는 아저씨들이 찌이익~찍, 끌고 다니는 슬리퍼를 말한다고 한정할 수 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G7 코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일단 쓰레빠가 ‘솔레파’로 변하는 순간, 오천 원짜리 낡은 발가락 받이는 노래로 격상된다.

 이 쓰레빠의 주인은 음식점에라도 갈라치면 지저분해서 누구도 발을 꽂기 싫어할 만한 슬리퍼를 항상 신발장 높은 칸에 곱게 올려놓는다.      


 다음은 쓰레빠의 독백

 -주인이랍시고 저 인간이 친구와 소주 네 병을 비우는 오십오 분 동안 화장실만 아홉 번 다녀왔어. 남녀노소를 불문, 대변기를 등지고 네 번, 소변기를 마주하고 다섯 번, 몸에 튄 오줌 방울들은 참을 수 있지만 문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간 두 번의 외출과 그 외출 중 내 배로 담배꽁초를 비벼 끌 때에는 슬리퍼로 태어난 이번 생이 저주스러웠어.     


 이 말을 전해 들은 주인은 몹시 미안해하며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라 약속했다. 이후 쓰레빠는 음식점 신발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가 되었다.      


 오래전 몇몇 시인들이 모인 술자리가 있었다. 서울이었으되 동네에서 신던 슬리퍼를 신고 갔다. 같은 업종이나 서로 초면인 자리이라 어색함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빨리 술에 취하는 일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취해갔다.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내 슬리퍼를 찾았다. 없었다. 낯선 분위기 탓에 슬리퍼를 높은 곳에 모셔 놓는 일을 잊은 것이다. 식당 소속의 진짜 공용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 문을 연 순간 초면의 시인 한 명이 내 슬리퍼를 신고 화장실 바닥에 누워 고이 주무시고 있었다. 아주 편해 보였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세라고 느끼는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노래를 신고 가다니!”     


 ‘최소 작용의 원리’가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고 한다. 이동할 수 있는 길은 수없이 많다. 이때 자연이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를 밝히는 원리이다. 자연은 작용량이 가장 작은 길을 택한다. 총에너지가 같다면 가장 짧은 시간의 경로를 택한다. 평평한 공간에서는 직선이다. 빛이 택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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