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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Jan 04. 2023

운명과 자유에 관한 방구석 사색

 인간은 운명 안에 갇혀 있고, 자유는 없는 것만 같다.     


 3차원의 공간까지 지각할 수 있는 인간에겐 시간이 과거-현재-미래 순으로 흐르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4차원의 세계에선 이미 시간 자체가 완결된 형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즉 인간이 인지하지 못할 뿐, 미래는 모두 결정된 채로 떡하니 놓여있다는 뜻이다.     


 꼭 차원의 문제까지 들어가지 않더라도, 물리학에서의 고전역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정확히는 거시 세계)를 결정론적으로 바라본다. 필연적인 인과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우주이기에, 우리의 세계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일정한 노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모두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할 수 없다는 잔인한 통보와 다름없다.     


 현대 물리학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양자역학에서 그나마 확률과 우연의 미시 세계를 보여주어 인간의 자유를 확보해 줄 근거가 마련된 것처럼 보였으나, 이마저도 “뇌의 화학반응은 철저히 고전역학적 원리들을 따르고 있다”라는 뇌과학자들의 증언이 등장함에 따라 그 지지력이 위태로워진 상태이다(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뇌의 자유와 적지 않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므로).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부르짖을 터전으로 더욱 적절한 곳은 역시나 철학인 셈인데, 그중에서도 생성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사상이 내게는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리좀(rhizome), 탈주, 탈영토화 등의 개념들을 강조하며 규정 불가능하고 끝없는 생성과 차이와 운동으로 세계를 기술했던 사상가이다. 그런 그가 소위 운명론을 믿거나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세계를 ‘차이를 동반하는 반복’이라고 표현했던 그의 문장에서 왠지 모를 의미심장함을 느낀다. 물론 여기서 그가 주안점을 두었던 단어는 분명 ‘차이’이지만, 나는 그가 ‘반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더욱 눈길이 간다. 것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영원회귀 사상을 재해석하는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표현이므로, 어떻게든 ‘회귀’에 대응하는 다른 단어가 필요했겠지만은, 나는 그토록 동일성이나 보편성을 부정했던 사람이 ‘반복’이란 말을, ‘다름’보단 ‘같음’의 뉘앙스가 훨씬 강하게 묻어 나오는 이 말을 저서의 제목(「차이와 반복」)으로까지 사용했다는 부분에서 미세한 균열을 느낀다.     


 그는 늘 짜인 범주대로만 움직이는 세계와 투쟁하고자, 다름과 차이가 먼저 있고 그런 와중에 반복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펼쳤으나, 나는 이것이 세계가 취하는 결정론적 움직임의 위력을 일부 시인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차이’라고 말하지 않고, ‘차이와 반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세계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육중하고 거대한 틀과 경로와 방향 등을 어떤 논리로든 간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테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는 그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가능성과 차이와 운동성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생성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만약 위와 같은 나의 추측이 맞는다고 가정한다면,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의 눈앞에 드러난 세계의 작동 원리란 실은 제법 유사하다. 수많은 가능성이 다양하게 물결치고 있는 미시 세계, 그리고 법칙과 결정성에 따라 묵묵히 나아가는 거시 세계. 이러한 이중 구조의 세계관을,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개개의 부분들 안에 전체의 원리가 들어있다고 주창했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의 모나드(monad) 이론이나, 이와 비슷하게 전체와 부분 간의 상사성(相似性)을 주창했던 베누아 망델브로(Benoît Mandelbrot)의 프랙털(fractal) 이론의 논리를 빌려와서, ‘세계의 움직임’이라는 전체와 ‘인간의 삶’이라는 부분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유비(類比) 관계가 존재한다고 상정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생도 양분될 수 있어야 한다, 거시 그리고 미시로. 거시적 인생이란 한 인간이 나아가게 될 삶의 대략적 방향성, 그 여정의 전반적인 굴곡과 추상적인 형태를 뜻한다. 그리고 미시적 인생이란 그 기나긴 삶의 무수한 작은 순간들이 띠게 될 구체적인 모습을 뜻한다. 이러한 구분 이후에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가 지닌 각 특성을 그대로 거시적 인생과 미시적 인생에 투사해 보자.     


 인생의 거시적인 방향과 굴곡은 이미 결정된 대로 흘러가고 형성되기에 ‘운명’이라고 볼 수 있고, 미시적 순간들의 수많은 선택과 감정과 사유는 차이와 가능성의 영역이기에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즉 운명이 바다의 어찌할 수 없는 파도와 날씨라면 자유는 그 환경 안에서 헤엄치는 방법과 자세인 셈이며, 운명이 한 목적지로의 오랜 주행이라면 자유는 그 길 위에서의 운전 방식이나 휴식 빈도인 셈이다.     


 운명과 자유는 보통 양립할 수 없다고들 말하지만, 이처럼 삶을 양분하여 생각했을 때에는 이 둘이 양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충분히 자유로운 순간들을 누리면서도 서서히 결국엔 운명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차피 정해진 곳으로 간다는 점에서 자유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면, 그에 대해 시원하게 반박할 답은 없다. 그저 큰 흐름 안의 작은 조각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곧 자유라는 식으로, 개념의 정의를 좁게 내리는 것이 우리에게 그나마 최선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방구석 사색답게 상상과 추측을 한껏 동원했음에도, 고작 이 정도의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 씁쓸한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의 존재를 도출해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까. 인간에게 있어서 운명이란 존재하며 그 힘이 참으로 막강하다는 직관에서 벗어나기란 이토록 쉽지 않다. 오직 결정된 삶만이 있다는 결론에서 한두 발자국이나마 이탈했다는 것에 잠시나마,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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