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 위의 진수성찬은 결국 음식물 쓰레기가 되고, 모두가 부러워하던 새 차가 덜덜거리는 고물이 되듯이, 타올랐던 사랑은 결국 식는다. 모두 뻔하디 뻔한 사실임에도, 사랑이 끝난다는 건 유독 아프고 쓰리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을 향한 맹세를 동반하기 때문일까. 맹세에 뒤따르는 기대와 희망은 그 크기만큼 낙심과 절망이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블루 발렌타인」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교차 편집을 통해 남녀의 대장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무너져가는 연인을 바라보는 이들은 ‘한 때는 참 사랑했을텐데’라며, 알지 못하는 그들의 과거를 상상하며 더 아파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그 아픔에 깊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상상의 과거 속 행복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대상이 막연하고 흐릿하면 대비는 비교적 덜 선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블루 발렌타인」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나보다.
쉽고도 확실한 전략으로, 이 영화는 인물들의 고통 속에 관객들을 잔인하게 동조시킨다. 익숙함과 권태감의 악력에 온몸이 으스러져 마침내 이별을 고하는 자는 자신의 처음을 결코 완벽히 떠올리지 못한다. 온전한 상기(想起)란 그저 의식으로 하는 것이 아닌, 몸과 살과 신경으로 하는 것이다. 고통에 찌든 사람의 육체는 처음을 떠올리기엔 너무나 지쳐있다. 그래서 생생하게 그들의 과거를 목도하고 있는 관객들의 슬픔과 이별에 처한 남녀의 슬픔의 간격은 보다 좁아진다.
푸른 빛이란 얼마나 우울하고, 또 얼마나 찬연한가. 끝내 깨지고 부서져 내리는 사랑의 슬픔이란, 그것의 당사자이든 목격자이든 간에, 사람을 우울이란 압력으로 한껏 찌그러뜨린다. 하지만 딘과 신디가, 그리고 과거의 나와 그 사람이 결국 이별을 겪었다는 사실에 그저 눈물만 흘리고 끝낸다는 건 여전히 사랑의 모든 과정을 온전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포 곳곳에 남아있는 그 역사 속엔 무수히 많은 환희와 영광이 남아있다.
사랑은 언제든 깨질 수 있기에 아름답다. 결코 깰 수 없는 무언가가 그대로 남아있는 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그건 그냥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든 말 한마디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시간 속에서 계속된다는 건, 그것이 결국 끝이 난 후에라도 숭고하다. 모든 순간이 소멸의 위기라는 점에서, 끝이 났든 나지 않았든, 잠시라도 존재했던 모든 사랑은 강하다.
「블루 발렌타인」은 그들이 행복했던 시절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엔딩 크레딧으로 끝맺는다. 이것은 어쩌면 끝까지 관객들을 울게 만들려는 고약한 심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심보를 비틀고 꺾는 것 역시 보는 이의 몫이다. ‘그때는 아름다웠는데’라는 울먹이는 회한 대신, ‘그때는 아름다웠어’라는 아련한 회상. ‘그래봤자’라는 무력한 결과론 대신, ‘그래도’라는 긍정의 의미론. 이 어리석은 낭만적 전환을 거친다면, 이 우울해 빠진 영화에서 우린 아직 타지 않은 씨앗을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계속 살아가기로 했다면, 그 짙푸른 대기 속에서 질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렇게라도 견뎌야만 한다. 펑펑 울다가도 이를 악문 채로. 그래, 이렇게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