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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May 30. 2022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자성(自省)과 긍정

※ 스포일러가 잔뜩 들어있습니다.



- 폭주하는 완다를 멈춘 사람은 결국 완다라는 것이 중요하다. ‘비샨티의 책’을 끝내 손에 넣어 활용하든, ‘다크홀드’의 힘을 빌린 닥터 스트레인지가 짧게나마 더 큰 위력을 발휘하든, 차베즈가 더 두드러진 각성을 하든, 완다를 무력으로 눌러 멈추게 하는 방향의 스토리는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험난한 여정의 끝에서 스트레인지 일행이 완다에게 벌인 행동은, 결국 다른 우주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것, 그저 그뿐이었다. 이것은 극 중 인물관계 속 안티 테제의 위치를 점하는 캐릭터를 악으로 규정해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치유 혹은 성찰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보여주었던 주제의식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치유 혹은 성찰을 ‘스스로’ 행한다는 점에서 더 확장된 버전이기도 하다.


 ‘내가 나를 변화시킨다’라는 명제는 닥터 스트레인지에게도 적용된다. 무수한 멀티버스 속에서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각종 악을 이미 저지른 상태이고, 그에 따라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규정이 이미 내려진 상태이다. 부정한 행동들을 저질렀던 닥터 스트레인지들은 표면상으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자기 자신이지만, 그 행동들로 인한 결과가 ‘이미’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의 주제의식을 보다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인물은 빌런 완다가 아닌, 주인공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우주의) 완다로 인해 변화하게 되는 것은 (우리 우주의) 완다의 현재이다. 지금 이 순간에 그릇된 길로 나아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발걸음을 멈춘 것이다.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는 다르다. 그(들)의 죄는 이미 저질러진 이후이고, 켜켜이 쌓인 역사가 되어 있다. 전적인 악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는 유연한 관점을 견지하더라도, ‘히어로’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기엔 분명히 부적절한 방향으로 그의 역사적 경로는 진행되고 있었다. 그 견고한 누층에 균열을 일으켜 선한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현재 이곳의 닥터 스트레인지다.


 관객의 감정선을 더 크게 자극하는 인물이 완다라는 점만큼이나, 작품의 주제를 더 강화하는 인물이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점(“한 번 길을 잃었다고 해서, 영원히 잃은 건 아니야.”) 역시 인지해야 할 부분이다.

          



- 금이 가 있던 시계를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침내 고치는 시기가 심리적 측면에서 제법 인상적이다. 작품 초반의 그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크리스틴에게 “행복해”라는 거짓말을 한다. 그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런 대답을 한다. 이는 자신의 삶과 시간을 긍정해야 한다는 테제(1편과 연결되는)로부터 나온 답변이기도 한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시간에 대한 긍정’을 결코 ‘애써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종반부에서 드러나듯, ‘행복하지 않기도 한 것’에 대한 인정이야말로 삶과 시간에 대한 진정한 긍정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늘 행복한 건 아니야”라고 인정한 후에야 시계를 고치는 것은 바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래에의 차이를 낳는 것이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메시지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함의(그래도 충분히 낭만적이지만)를 MCU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비주얼의 작품이 품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아이러니이자, 형식-내용 간의 극명한 대비를 활용하는 매력적 전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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