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시를 읽고 싶은 당신에게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기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 지성사, 1984)
미망 (未忘) 혹은 비망(備忘) 1 부문
세월은 내게 뭉텅뭉텅
똥덩이나 던져주면서
똥이나 먹고 살라면서
세월은 마구잡이로 그냥,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내 정신과 육체의 한 가운데서,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
미망 (未忘) 혹은 비망(備忘) 2 부문
먹지 않으려고
뱉지 않으려고
언제나 앙다물린 오관들.
그러나 언제나 삼켜지고
뱉아져나오는
이 조건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지성사, 1993)
삶은 아름다운 것일까요, 지긋지긋한 것일까요.
저는 막 20살이 된 이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삶이 지긋지긋하고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에는 물론 당시의 여러 상황적인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빠져 있었던 점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사실 이 글이 철학 소개글도 아니고, 제가 철학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저의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제게 저 질문이 매우 중요했고 그렇기에 최승자 시인은 제게 매우 각별한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최승자 시인은 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 중인 문단의 원로 시인입니다. 그는 시인이면서 훌륭한 문학 번역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오랜 기간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아온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어떤 시인들보다 삶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한 시인인데, 동시에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다뤄온 시인이기도 합니다.
소개글의 시작을 또 다른 최승자의 시로 시작한 이유는 삶에 대한 시인의 기존 인식이 어떠한지를 알고 다시 소개드린 시를 읽었을 때 그 느낌이 사뭇 다르게 다가오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소개글 도입부의 「미망 혹은 비망」연작시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최승자 시인은 삶이라는 것 자체를 어찌 보면 격렬히 혐오하면서, 동시에 가장 열렬히 탐구해온 시인입니다. 그렇기에 위 두 시의 주된 골자가 삶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시인이 삶 자체를 의미 없는 것으로 결론 지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삶 자체가 의미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면 시인이 지속적으로 삶에 대한 질문을 토대로 시를 써오지는 않았겠지요.
결국 최승자 시인에게 삶이란 20년이 넘도록 풀리지 않는 불쾌한 미지수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함께 읽어본 소개시 「20년 후에 지(芝)에게」를 볼까요?
먼저 이 시는 '지(芝)'라는 아이에게 시인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습니다. 아마 시인의 조카나 그가 가깝게 아는 아이이지 않았을까 예상이 됩니다.
큰 분석이 필요한 시는 아니나, 부분부분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지금 네 눈빛이 닿으면 유리창은 숨을 쉰다. 지금 네가 그린 파란 물고기는 하늘 물 속에서 뛰놀고 풀밭에선 네 작은 종아리가 바람에 날아다니고,
첫 연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눈빛이 닿자 유리창이 숨을 쉬고, 아이가 그린 파란 물고기가 하늘에서 뛰놀고, 풀밭을 뛰는 아이의 종아리는 바람에 날아다니는 듯 보이네요.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아이의 생기가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문단을 읽으면서 화자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애정이 너무 잘 전달됐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지, 살아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 빈 벌판에서 차갑고다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지.
생에 대한 끝없는 부정과 비난 속에 있던 최승자 시인이 어린아이에게 건네는 삶에 대한 고백이라는 점에서, 저는 시인의 이 말이 너무 아프면서 아름답고, 동시에 단번에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살아있다는 건 참 이상하게도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입니다. 조금만 빗겨가도 삶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의미 아래 지긋지긋한 것으로 나가떨어져 버리지만, 이상하게도 삶은, 살아있다는 것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다시 균형을 다잡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시인은 그러한 삶이 '빈 벌판에서 차갑고도 따스한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도 앞선 삶에 대한 고백과 연결되었을 때 매우 적확하고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자신을 챙겨줄 어떤 사람도 없는 빈 벌판에 선 화자가 고요히 비를 맞고 있는 풍경. 하지만 그 비는 차갑고 시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따스함을 품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신기로운 것들이 네 눈의 수정체 속으로 헤엄쳐 들어오고, 때로 너는 두 팔 벌려, 환한 빗물을 받으며 미소짓고……
이제 막 세상에 나아가는 아이의 눈에 세상은 신기롭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어떤 이에게는 차갑고 시리게 느껴지는 비도 아이에게는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앞선 시구에서 고요히 비를 맞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졌다면, 지금은 화자가 없는 빈 벌판에 선 아이가 웃으며 비를 맞고 있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윽고 어느 날 너는 새로운 눈을 달고 세상으로 출근하리라
많은 사람들을 너는 만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네 눈물의 외줄기 길을 타고 떠나가리라.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아이가 언제까지나 아이일 수는 없듯, 신기로운 것들이 넘쳐나던 세상은 서서히 변해가다 언젠가 출근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또 눈물 속에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순간도 마주치게 되겠지요.
흘러간 강물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 삶은 냉정하게 강물처럼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닐 지(芝)는 그런 거대한 세상 속에서 '삶'이라는 자신만의 강을 이뤄 돌아올 수 없이 흘러가야만 하겠지요.
그러나 나의 몫은 이제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 봐라, 저 많은 세월의 개떼들이 나를 향해 몰려오잖니, 흰 이빨과 흰 꼬리를 치켜들고 푸른 파도를 타고 달려오잖니. 물려 죽지 않기 위해. 하지만 끝내 물려 죽으면서, 나는 깊이깊이 추락해야 해. 발바닥부터 서서히 꺼져들어가며, 참으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게 실은 나의 사랑인 까닭에.
아이에게 삶에 대한 조언을 끝낸 화자는 이제 자신의 삶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상하게도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삶'을 뒤로한 채, 그에게 남은 것은 '깊이깊이 가라앉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똥이나 던져대던 세월'은 이제 개떼의 모습으로 그를 물어 죽이려 몰려오고 있고, 물려 죽지 않기 위해 깊이 가라앉다 끝내 물려 죽는 본인의 모습을 그는 '연극적으로 죽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시에 그것을 그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고독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이다. 그러므로 하나 속의 둘이다.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모든 타인들에 의해 버려진, 그야말로 하나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외로움'과 '고독'을 각각 구별하여 정의하며 '고독'을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고독은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며 탐구의 과정입니다.
최승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자신의 생을 자기 눈으로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 시 속 화자의 모습처럼, 최승자는 자기 자신의 삶을 끝까지 홀로 지켜보고 있던 고독한 목격자이겠지요.
그런 측며에서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사랑이라 고백하는 화자의 발화는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끝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삶에 대한 질문 속에 죽어가는 그의 모습은 연극적이지만, 동시에 그런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들은 그가 아이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답다'고 말하게 만드는 근거가 되었겠죠. 그것이 결국 화자에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었을 테고요.
그리하여 21세기의 어느 하오, 거리에 비 내리듯 내 무덤에 술 내리고 나는 알지 어느 알지 못할 꿈의 어귀에서 잠시 울고 서 있을 네 모습을,
이 시가 쓰여진 시기는 1980년대 입니다. 당시 21세기의 어느 하오는 화자에게 멀고도 가까운 미래였겠지요. 그러므로 머지 않은 죽음을 앞둔 사람의 입장에서 21세기의 어느 하오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현재 싱그럽게 뛰노는 지(芝)는 그 시기에 존재하고 있겠지요. 더 이상 신기로울 것 없는 세상에 홀로 선 채 울며 자신의 무덤에 술을 뿌리면서요.
자신의 죽음 이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어떤 후회도, 욕망도, 격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 외롭지 않은 고독 속에, 오래도록 그가 자신을, 또 자신의 죽음을 바라봐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윽고 네가 찾아 헤맬 모든 길들을, -가다가 아름답고 슬픈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동냥 바가지에 너의 소중한 은화 한 닢도 기쁘게 던져 주며
마침내 네가 이르게 될 모든 끝의
시작을!
삶은 결국 정답을 찾아 끝없이 헤매는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길을 잃은 자로서 방황할 수밖에 없고, 최승자가 그러했듯 끝없이 삶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 곁의 사람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동냥 바가지에 그들의 은화가 쌓인 만큼, 그들의 동냥 바가지에 나의 은화를 던져주며 함께.
그러므로 21세기의 어느 하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이 서 있는 오늘, 우리는 아슬아슬하지만 삶이란 결국 아름다운 것이라고 조용히 고백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삶에 끝이 있다면 그 끝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화자가 이제 막 세상에 들어서는 지(芝)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이, 끝과 시작은 맞물려 있고, 결국 모든 끝은 시작이 될 수 있겠지요.
(*이 리뷰글에서 사용된 인용 시와 제목을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