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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기 Feb 10. 2024

사랑 잃은 자의 쓸쓸한 독백 (기형도_  「빈집」 )

ep.2) 시를 읽고 싶은 그대에게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여러분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사랑을 잃어본 적은요?

지난 시간 진은영 시인의 아름다운 사라의 시를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슬픈 사랑시 한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기형도 시인의 「빈집」 입니다.

먼저 기형도 시인에 대해 아주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아마 교과서에서 「엄마 걱정」이라는 시로 더 잘 알고 계실 기형도 시인은 80년대 우리나라 시단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입니다. 한국의 현대시를 기형도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설명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거대한 파급력을 지녔던 시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기형도 본인은 자신의 시집을 보지 못한 채 30대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이렇게 시 속에서 목소리가 생생한데, 이 사람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시 「빈집」은 기형도 시인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 되어버린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에 수록되어 있는 시입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여러분은 사랑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사실 이 질문에 답하신다면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상실도 함께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는 언제나 양쪽이 균등하게 무게를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계속되다 보면 언젠가는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것이든, 다른 무엇을 향한 것이든요.

그렇기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화자의 선언은 그 말만으로도 우리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경험했고, 자기 안에 그 상실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록해두고 있으니까요.

사랑의 상실을 경험한 화자는 2연에 이르러서는 많은 것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짧았던 밤, 겨울 안개, 촛불, 흰 종이 등등... 하지만 작별을 고하는 대상이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잠깐 지난 리뷰글에서 함께 읽었던 진은영의 「청혼」을 다시 볼까요? 저는 진은영의 「청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차고 넘치는 사랑시들 중에 진은영의 시가 사랑받은 이유가 뻔한 사랑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에서 작별을 고하는 주체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좋은 시는 언제나 이렇듯 새로움을 동반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독자의 예상에 쉽게 포획되지 않으면서 충분히 독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열어줄 수 있을 만한 지점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시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시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시는 한 문장에 대한 의미가 정확하게 하나로 수렴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그 문장에 대한 의미가 아주 다양하게 변할 수도 있고, 여러 개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해당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신다면 시를 온전하게 즐기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시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처음에는 필요합니다.

이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2연의 문장이 이해되지 않으신다면, 다른 이해되는 무장들을 토대로 해당 부분을 자유롭게 '감각' 하시면 됩니다.

2연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1연 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연에서 헤어지고 있는 주체들이 사랑의 상실과 연관성이 있겠다는 점까지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사랑을 잃은 주체가 짧았던 밤을 기억하며 그와 이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의 속도라니? 시간은 다 똑같이 흐르는데 무슨 소린가,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자, 각자 사랑을 했던 시기를 떠올려 봅시다. 사랑하는 사람(혹은 다른 존재)과 함께하면 그 시간이 밤이든 낮이든 자기도 모르게 금방 흘러가버리지 않던가요? 그래서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밤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이 시의 화자가 시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다른 해석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밤마다 시를 쓰는 데 몰두하는 사람일 수 있겠죠? 사랑의 주체는 시 혹은 시를 쓰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를 쓰는 밤의 시간을 짧게 느끼고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촛불과 이별?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혼란스러우실 수 있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모르면 그냥 놔두셔도 되고, 자유롭게 받아들이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 촛불이 어떨 때 많이 쓰이지? 하고 먼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촛불은 기념일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그게 아니라면 시위 같은 것을 할 때도 많이 사용하죠? 기념일에 사용하는 촛불로 가정한다면 미래에 이별하게 될 것을 알지 못한 채 촛불을 켜고 축하를 빌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위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시위가 일어난 상황에서 사용되는 촛불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투영시켜 표현하곤 합니다. 이렇듯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던(사랑했던) 과거의 한 순간을 그것을 잃은 지금 다시 떠올릴 때, 사람은 그것들에 대한 작별을 비로소 고할 수도 있을 겁니다.

화자가 시인이라는 가정 하에 본다면, 앞선 '짧았던 밤'에 시를 쓰며 켜두었던 촛불일 수도 있겠습니다. 화자인 시인이 열심히 시 속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동안, 그 옆에 켜져 있던 촛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요히 타들어가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제 아시겠죠? 짧은 한 문장 안에 전혀 결이 다른 세 개의 해석이 공존할 수도 있는 거랍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이 문장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선 흰 종이가 불안을 기록하던 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이별은 갑작스럽게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과도기를 거치게 됩니다. 앞선 사랑에 대한 묘사를 빌어 표현해 보자면 사랑의 균형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던 시점이 되겠죠? 그렇다면 화자는 사랑이 기우는 동안 자신이 느꼈던 불안을 기록해 왔을 수도 있겠습니다. 흰 종이는 결국 화자의 상실에 대한 공포를 기록하던 곳일 수 있겠고요.

화자가 시인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창작의 순간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쓰려고 노력해도 계속해서 흰 종이만 지속되는 상황에서 느끼는 창작의 고통. 그 시간을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죠?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사랑의 균형이 기울어질 때, 우리는 상대방과 어긋나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 순간들이 쌓여서 결국 사랑은 무너지게 되는 것일 테고요.

그렇기에 여기서의 망설임은 왠지 상대방과 어긋나던 순간들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관계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을 꺼낼 수도 없고, 해결 방법도 명확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화자가 시인이라고 한다면 창작의 과정에서 계속되는 망설임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이 문장을 써도 될까? 내가 이 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사람들이 시를 읽고 충분히 내 의도를 알 수 있을까? 등등 시인으로서의 주체가 고민하던 순간들에 대한 문장으로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이 부분은 결국 첫 연과 사실상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결국 무언가를 열망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그 사람을 보고 싶고,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싶고, 꼭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듯이 사랑은 곧 많은 열망을 불러옵니다. 그렇기에 열망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화자는 곧 첫 연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고 선언하던 화자와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너무 아름답고 아픈 문장입니다. 비로소 완전히 이별하는 주체의 모습을 비유적인 이미지로 그리고 있네요.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 조금 궁금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프게 이별하고 있는 화자는 대체 어느 공간에 있는 걸까요? 화자는 문 바깥에 있는 걸까요, 문 안쪽에 있는 걸까요?

이게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화자의 위치에 따라 그 의미는 정반대가 되기도 하고, 더욱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답니다.

먼저 사랑을 빈집에 두고 바깥에서 문을 잠그는 화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과거를 모두 빈집에 가두고 바깥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화자의 모습을 그린 것일 수 있겠네요.

둘째로는 빈집 안에서 문을 잠그는 화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화자의 모습을 볼 때 불 꺼진 빈집에서 문을 닫고, 홀로 갇혀버리는 화자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해석을 조금 더 깊게 해 봅시다. 화자는 마지막 행에서 빈집에 갇힌 주체가 '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자는 사랑을 빈집에 가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랑을 억지로 끌어안은 채 함께 빈집에 갇히기를 선택한 겁니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랑은 잃을 수 있으나 없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사랑, 이미 잃어버린 그 사랑을 영원히 끌어안고 살아야만 하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앞선 첫 번째 해석으로 시를 읽어낸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장면을 이렇게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과거의 사랑을 빈집에 두고 겨우 문을 잠근 사람이, 그 문 앞을 영영 떠나지 못한 채 서성이는 모습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을 스쳐간 많은 사랑의 역사가 지금 여러분 안에는 어떤 방식으로 새겨져 있으신가요? 아프지만 아름답게 상처를 짚는 이 시를 통해 여러분이 과거의 기억을 한 번쯤 다시 되짚어보시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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