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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이

다정이 시샘에게 

내 친구 시샘의 날개를 알아봐 줄, 그리고 너가 알아볼 날개를 가진 그 사람을 위해 내가 거의 식기도하듯 매일 기도하고 있다는 걸 알지? 그 기도가 이루어진 날에 느낄 나의 기쁨도 예약되어 있고. 


시샘이 나와 다른 친구들의 결혼을 겪으며 느꼈던 감정에 대해 이렇게 밀도있게 들은 건 처음인 것 같아. 어렴풋이 스치며 들은 적은 있어도, 너도 혹시나 내가 마음 쓸까 싶어 굳이 깊게 이야기 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었던 같아. 그런데 이렇게 편지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어. 너가 감수해주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선명히 알지는 못하고 지레짐작 할 때가 많았거든. 너가 그간 감수해 준 서러움, 박탈감, 자존심의 스크래치, 외로움 같은 것들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어서, 그게 고맙더라. 그런 감정을 감당하면서도 나와 친구해줘서 고맙달까. 그리고 쉽지만은 않을 너의 시간을 너답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도 참 고맙고. 


내가 결혼을 하고 느낀 것 중 하나는 남편의 자리로 다 채울 수 없는 친구의 자리가 분명히 있다는 거야. 그리고 네가 나의 삶 속 너의 자리를 한결같이 채워주어 결혼 후 겪은 수많은 변화와 폭풍 속에서도 다시 살아갈 힘을 냈던 것 같아. 나 역시도 너의 삶 속 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은 마음이야. 


각자가 감당해야 할 것을 감수하면서

여전히 지켜내는 우리 사이가 새삼 든든하네.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이


서로 얘기한 적도 없는데 각자가 같은 물건을 골랐던 일은 이제 우리에게 신기한 일도 아니지. 작년엔 알고보니 같은 달력을 쓰고 있었고, 올해는 같은 일기장을 샀다는 걸 발견하고는 역시 너고 나다 하며 껄껄 웃었잖아. 그림책 부터 시작해서, 빈티지 소품들, 공간을 가꾸는 것, 기록에 대한 관심 등 너와 나의 수많은 교집합 안에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일이 더욱 재밌는 일이 됐어. 많은 걸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니 너와 나누는 대화가 끊임없이 즐겁고 풍요로웠지. 이제는 같이 그림책을 좋아하다 못해 이렇게 편지를 가장한 책까지 함께 쓰고 있으니 이보다 더 풍성할 수 있을까. (그와중에 남자 취향은 안 겹쳐서 그건 참 다행이다 싶네. 우리 우정을 지켜낸 중요한 포인트일 수 있어. 허허.)


너랑 <어바웃 타임>을 같이 본 날이 생각난다. 그때가 우리가 대학생 때였지. 21살이었나? 방학을 마치고 포항에 있는 학교로 내려가기 위해 너와 나는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만났고, 버스 시간까지 시간이 붕 떠서 터미널에 연결되어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나 한 편 보자고 했어. 별 기대없이 상영 시간이 맞았던 <어바웃 타임>을 봤지. 포스터의 첫인상은 킬링타임용 로맨스 영화였는데, 의외로 이 영화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랑과 인생을 아우르는 깊이 있는 영화였어.


영화를 볼 수록 장면의 아름다움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캐릭터와 환타지적 요소와의 절묘한 조화, 그럼에도 우리 일상에 절절히 와닿는 서사에 깊이 빠져들었어. 학교 가는 차 시간을 안전히 맞추려면 영화를 다 못 보고 나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마주하는 모든 장면과, 그로 인해 품게 되는 감정이 너무 좋아서 끊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서 난 너에게 맡겼어. 시샘이 일어나면 그때 일어나자. 너가 일어났으면 좋겠으면서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어. 물론 역시나 너도 정신 못 차리고 영화에 푹 반해있었지. 


결국 우리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버스 출발 2분 정도의 시간을 남기고 버스 탑승구를 향해 전력 질주를 했으며, 눈 앞에서 버스를 얄짤없이 놓쳤어. 우린 버스를 놓치고도 원망 하나 없이 깔깔 웃으며 영화 너무 좋지 않았냐는 수다를 가득 채웠지. 우리가 타려던 버스가 포항 가는 막차였기에, 경주 가는 막차를 타고 새벽에 경주에서 내렸고, 편의점에서 밤을 샌 뒤 경주에서 포항 가는 첫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어. 영화 한 편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게 좀 주책이었나 싶다가도, 그 주책을 함께 부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즐거웠어. 난 아직까지도 그때 본 <어바웃 타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야. 


그러니까 너와 좋아하는 게 비슷한 덕에 

누리는 행복이 커.


혹시 ≪나의 작은 집≫이라는 그림책 봤어? 이 책이 나는 참 좋았고, 너 역시도 좋아할 거 같다고 조금은 확신해.


어떤 동네에 낡고 소박한 작은 집이 하나 있는데, 이 집에는 이 곳에 머물렀던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양과 꿈이 스며있어. 같은 집이지만 누가 사느냐에 따라 다르게 펼쳐진 이 집의 역사가 그림책에 차곡 차곡 담겨있더라고. 이 작은 집은 자신이 만든 자동차로 여행을 떠나는 꿈이 있는 정비사 아저씨의 카센타였다가, 아프리카의 사진을 찍고 싶었던 사진사 아저씨의 사진관이 되었어. 그 다음은 할머니와 길 고양이의 사랑방이었다가 발랄한 청년들의 모자 가게가 되었지. 그리고 한 동안은 누구의 집도 아닌 빈 집이었어. 그러다 그림과 차를 좋아하는 한 아가씨가 나타나. 그녀는 낡고 오래된 집을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로 정성스레 가꾸기 시작해. 그리고 그곳에 작은 찻집을 열고 동네 사람들을 맞이하지.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내가 나의 공간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들이 생각 나 설레였어. 특히 이 찻집 아가씨에게 이입이 됐거든. 내게도 그녀와 닮은 꿈이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가장 나다운 공간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다정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은 꿈. 그리고 바로 너도 생각났어. 너 역시도 이 책을 보게 되면 이 아가씨에게 이입할 것 같았어. 너에게도 그런 결의 꿈이 있고, 사실 너는 이미 이루고 있잖아.


이 책을 읽고나서 네가 생각났으니 너에게 바로 선물하려다가 주춤했어. 주춤하면서도 의아했지. 나는 왜 주춤할까. ‘하고 싶은 일’에서 네가 떠오를 때와 ‘좋아하는 것’에서 네가 떠오를 때 느끼는 감정의 색깔이 다른 거 같아. 


‘하고 싶은 일’의 측면에서 

너와 나 사이의 교집합은 

나에게 저릿한 파장이 일으켰으니까.



사실은 부러워서 그래


유일하고 싶은 욕구가 나를 지배할 때가 많았던 것 같아. 어릴 때부터 나는 애매모호한 사람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와서인지,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생각보다 큰 어른이 되었어. 성격도 내성적이고, 좋아하는 색깔 하나도 고르지 못한 채 우유부단하고, 어딜 가도 튀지 않는, 딱히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바라봤거든. 그 뒤틀린 시각이 씨앗이 되어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는 흔한 말도 거부하고, 반드시 나만의 고유한 것을 해야할 것 같은 압박에 지나치게 시달리고는 했어. 결국 그 덕에 나다운 길에 대한 고민을 일찍부터 하며 여기까지 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과거는 아쉬운 부분이야.


어쩌면 너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으니 너에게도 유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 추측했어. 그래서 때때로 네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겹치는 듯할 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굳이 하지 않기로 선택한 때도 있었어. 혹시 너의 유일함을 내가 방해할까봐. 어쩔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너에게 굳이 하지 않기도 했어. 혹시라도 너도 이미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서로 불편한 파장을 겪을까봐. 


결혼을 하고, 몸이 아파 퇴사를 하고, 낯선 도시로 이사를 가고, 임신과 출산, 육아까지 겪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있어서는 마음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잖아. 너와 내가 하고 싶은 게 딱 똑같지는 않더라도 주요한 키워드들(예를 들어 그림책, 공간, 만남 등)이 닮아있는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나와 달리 시샘은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부러웠어. 


맞아. 

네가 날 앞서 나가는 게 부러웠어. 


너는 내가 먼저 결혼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느꼈다지만, 나는 너가 나보다 앞서 너의 일을 너답게 일구어나가는 게 부러웠어. 


‘나도 내 일을 해야하는데 언제 할 수 있을까?’ 싶어 조급해지고, ‘난 왜 시샘처럼 용기있게 바로 뛰어들지를 못 할까?’ 비교하며 불안하기도 했지. 너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고, 그 걸음이 그냥 된 것이 아니라 네가 치열히 고민하고 부단히 껍질을 깨고 헤쳐나간 결과라는 건 내가 증인이기에, 순도 100프로로 기쁨의 응원만 보내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너에게 전하는 박수 뒤에는 신발바닥에 붙은 껌처럼 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널 향한 부러움이 끈적하게 붙어 있었지. 그게 그렇게 죄책감이 들더라. 


나는 너와 나의 비슷함이 불러일으키는 부러움의 파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야. 일단은 그 저릿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어. 


사실 너가 부러웠던 건 이뿐만이 아니야. 스무살 때 처음 만난 넌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도 너의 색이 뚜렷했어. 나는 스스로를 무채색의 인간으로 보고 있었는데, 너는 명확한 너의 색을 가지고 빛나는 사람 같았어. 너가 있는 곳에는 늘 명랑한 기운이 넘쳐흘렀고, 귀여운 골목대장마냥 사람들을 이끌며 재밌는 일들을 만들어냈지. 난 너처럼 뚜렷한 사람이 될 자신은 없지만 그런 네가 부럽고 좋아서 네 옆에 딱 붙어 너가 하자는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냥 좋아하며 같이 했던 것 같아. 호기심과 관심이 많아도 늘 수줍음에 압도되는 나는 너가 수줍은 기색 하나 없이 타인에게 당차게 질문을 건낼 때도 부러웠어. 새로운 일을 할 때 주저하는 시간이 긴 편인 나인데, 너는 용감하게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바로 행동에 옮길 때가 많아서 그것도 부러웠고.

  

너를 향한 부러움은 많고 많은데도 올해가 되어서야 나는 너에게 “너가 부러웠어.”라는 말을 처음 제대로 할 수 있었어. 너는 너의 예명을 ‘시샘'이라고 지을 정도로, 시샘하는 너의 자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때때로 나에게도 날 향한 너의 시샘을 표현했잖아. 반면 나는 잘 그러지 못했던 게 너를 향한 시샘이 없었던 게 아니라, ‘부러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무서워했기 때문이었어. 



‘부러움’을 무서워했지만


앞선 편지에서 얘기하기도 했듯,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영문을 모르고 왕따가 되었었어. 아직도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그 이유가 내가 우리 집 새 냉장고를 자랑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어. 난 우리 집 냉장고가 뭔지 그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봤는데 말이야. 그 후로는 괴롭힘의 강도가 좀 잠잠해졌다가도 내가 상을 받거나, 선생님의 칭찬을 들으면 난 다시 왕따의 대상이 되었어. 내가 미움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그 누구로부터도 부러움을 받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그 때부터 가졌던 거 같아. 어리고 미성숙한 시절에 속수무책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 나라는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게 서글프기도 해.  


그렇게 '부러움'에 대한 공포가 내 안에 상상 이상으로 깊게 각인되어,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때때로 누군가 나에게 ‘부럽다'는 말을 하면, 곧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어. 네가 나에게 처음 ‘부럽다'는 말을 했을 때도 네가 곧 나를 밀어낼까봐 무서웠지. 


부러움'은 ‘미움''의 전 단계라는 

과도한 일반화를 하고 살았던 거야.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확신이었기에 바꾸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내 안에서도 널 향한 부러움이 올라올 때, 어서 치워버려야 하는 짐짝처럼 대했던 거 같아. 그럼에도 통제할 수 없이 자주 ‘부러움'을 만났지만 말야. 


그런데 올해 1월에 네가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네가 나에게 그랬잖아. 


너는 “부럽다”는 말이 

상대방을 향한 칭찬이라고. 

그게 너무 놀라웠어. 

한 번도 칭찬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아, 날 향한 너의 부러움도, 널 향한 나의 부러움도 칭찬이 될 수 있구나.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게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게 갑자기 큰 자유를 주더라. 


네 말이 ‘부러움'이라는 감정 전체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테고, “부러움”이 “미움”을 낳는다는 나의 기존 확신을 전부 부술 수는 없을 지라도, 적어도 너와 나 사이의 부러움을 다르게 대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어.  


그때부터 마음이 확 놓여서 너에게만큼은 ‘부럽다’는 말을 조금은 남발하고 있는 요즘이야. 그동안 꾹꾹 눌렀던 시간이 있어서니 이해해주기를 바라.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각자 하고 싶은 영역이 더 정교해지고 다듬어지면서 우리가 똑같은 걸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도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기에 그걸 구현할 방법과 속도도 다르다는 걸 알고 있어.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던 부분이었나 봐. 


≪나의 작은 집≫에서도 같은 집에서 어떤 사람이 머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모양의 꿈이 피어나는 걸 보듯, 너가 만들어 갈 너만의 작은 집과 나의 작은 집은 분명히 다르겠지. 누군가가 먼저 앞서 나가는 것 같을 때 부러움은 올라올 수 있지만, 그 부러움을 칭찬으로 전하며 조금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근육이 길러지는 중인 듯 해. 


내게 무시무시하게 무거웠던 부러움 따위 

결국 가볍게 여길 수 있을 만큼, 

너와 비슷해서 좋아. 


닮은 구석이 많은 네가 있어 이번 생 좀 덜 외로워. 


P.S ≪나의 작은 집≫을 너에게 선물하려다 널 향한 부러움과 나의 속도에 대한 불안으로 주춤했었지만, 이 편지를 쓰면서 꼭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차올라. 편지를 마무리하고 너에게 바로 보내려고. 네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너만의 빛깔로 가득 채우고 있는 시샘을, 네가 만들 너만의 작은 집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나의 작은 집≫ 책과 편지를 전해.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나의 작은 집≫

김선진(글/그림), 상수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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