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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70%로 사는 충분한 삶

다정이 시샘에게 

각자의 그늘을 감당하다가 우리는 오랜만에 연희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만났지. 그때 너가 내게 건넨 ≪새의 심장을 펼치자마자 난 역시나 또 울고 말았잖아. 사실 그림책을 읽기도 전에 눈물이 터졌어. “너와 별이에게 주는 그림책이야. 별이의 존재를 계속 기억하면서 그 의미를 천천히 알아가자"라는 너의 메모에. 


그 당시의 나는 별이를 기억해야 할지, 잊기 위해 노력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할 때였어. 주변을 둘러보니 유산을 겪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더라. 어떤 이들은 정말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 같은 슬픔을 떠안았고, 어떤 이들은 애써 떠올리지 않고 담담하게 이 시기를 잊으려 노력하더라고. 어떤 방식이든 각자가 이 이별에 대한 슬픔을 대하는 방식일텐데, 나는 어떤 방식을 취해야할 지 정하기가 어려웠어. 당사자들에게는 생명을 잃은 것이지만 남이 보기에는 세포의 종말 정도로도 여기는 것 같기도 해서 내가 너무 유난을 떠나 검열도 했지. 하지만 어쩔 도리 없이 이러나 저러나 고통이었던 것 같아. 


별이를 기억하기엔 아팠고, 

별이를 잊기에는 슬펐어. 

그때 나보다도 먼저 별이를 기억하겠다는 

너의 편지를 보며 

나도 별이를 기억할 용기가 났어. 


이러나 저러나 힘들다면, 그냥 소중히 기억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었어. 그게 참 고마워. 시간이 지날 수록 슬픔의 색은 옅어지고 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늘 별이의 자리가 있을 것 같아.  


이전에 편지에 썼듯, 다 안다는 말 보다도 다 알지 못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전하는 온정에서 난 더욱 깊은 따스함을 느껴. 네가 전해 준 새의 심장도 그렇게 따뜻했어.  


네가 내가 겪는 걸 다 겪어볼 수 없었듯, 나 역시 네가 겪는 걸 다 겪을 수가 없지. ADHD 진단을 받았다는 너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조금 머뭇거렸어. 별일 아닌 것처럼 반응하기엔 그동안 네가 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며 분투했던 것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어. 그렇다고 큰일인 것 처럼 하기엔 네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일을 잘 통과할 것을 믿기에 유난을 떨고 싶지 않았지. 그렇게 조금은 어버버하지 않았나 싶어.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 너는 그동안 너 스스로를 방해한 모든 것의 원인을 찾은 것 같아 개운하다고 이야기했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허무함을 느끼다가도 다시금 스스로에게 다정해지겠다고 마음 먹었다 했지. 그런 너를 보며, 솔직하게 직면하는 용기에, 차오르는 단단함에 감탄했어. 조금은 가벼워진 숨소리로 다시 또 살아내는 너에게 난 진심으로 고마웠어. 친구라는 내가 가까이서 실질적은 도움을 못 주는데도 이렇게 무너지지 않고 나아가주는 게 고맙더라. 


하지만 때때로 이도 저도 소용없이 무거움을 느끼는 날엔 나에게도 그 무거운 마음을 좀 나눠줘. 난 시샘의 마음을 늘 듣고 싶으니까. 



나를 충분히 여기는 길 


너가 상담을 받으면서 나에게도 받아보라고 추천을 했잖아. 난 약간 친구 따라 강남 여러 번 갈 재질이라, 특히 시샘의 말에는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결국 상담을 신청했어. 


대학교 때 상담심리를 복수전공 했으니 그 때 내가 상담에 대한 경험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고, 내겐 상담사 이상으로 진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와 가족이 있으니 살면서 필요를 못 느꼈었는데 말야.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사람들에게 말해도, 아무리 골똘히 생각하고 노력해도 반복해서 넘어지는 나만의 골칫거리들이 선명히 보였어. 그래서 전문가에게 상담을 한 번 받아보고는 싶었는데, 네 추천이 스위치가 되어주었지. 마침 무료 상담 6회기를 받을 기회가 있었거든.


나의 이렇고 저렇고 한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 내가 자신에 대한 기준이 정말 높은 사람이라고. 남들이 뭐라 하던 자기 자신이 만족해야 하는데, 그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서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에도 길이 있어서 다정씨는 계속 자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찾는 쪽으로만 생각의 길이 흐를 것이라고. 이제 본인에게 만족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도 새로운 길을 내는 것과 같아서 꾸준한 삽질, 즉 연습이 필요할 거라고. 한 번에 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돌아보니 내가 진심으로 나에게 만족스러워해 본적이, 스스로 잘했다고 이야기해준 적이 정말 없더라. 제법 만족할만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내게 했던 가장 최고의 칭찬은 ‘다행이다’ 정도였고, 만족감을 충분히 느끼기 전에 바로 다음 해야 할 일에 몰두했지. 하지만 그렇게 계속 달리다 보니 종종 바닥에 닿곤 했어. 체력이나 정신력이나 마음이 바닥칠 때가 잊을만 하면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조금은 가학적인 나의 패턴을 다르게 만들고 싶었어.   


그러니까 스스로에게

“최고다"까지는 이야기하지 못 하더라도, 

“충분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되고 싶었던 거야. 


사실 난 ‘충분'이라는 단어에 오래도록 성이 안 찼었거든. ‘충분하다’는 표현이 완벽주의로 똘똘 뭉친 내게는 모자란 표현이었기 때문이야. 용량이 100인 병이 있다면 나는 적어도 120은 채워서 흘러넘쳐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충분하다는 말은 꼭 70 정도만 채워진 병을 보는 거 같았지. 


그래서 충분하다는 말이 

내게는 칭찬 같지가 않았어. 

괜찮긴한데 완벽하진 않다고 꼬집는 말 같았달까.  

그런데 이제는 “충분해”라는 단어를 

진심의 칭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어. 


특히 나 자신에게 말야. 100인 내가 늘 120 정도는 하려고 하다 보니 자주 지쳤던 걸 아니까. 난 생리를 6개월 동안 안 하거나, 살이 10kg 넘게 찌거나, 얼굴 반쪽이 두 달 동안 마비되거나 하는 식으로 무언가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낼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멈추곤 했잖아. 70이 차 있는 잔을 보고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눈이, 70도 충분하다고 여기며 만족할 수 있는 쪽으로 바뀐다면 더는 그런 무모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다 싶어. 만족스러운 순간이 내 일상에 훨씬 많아질 테니. 그 충분함이 양분이 되어 내가 바닥을 딛고 일어서서 나아가는 걸음이 더 건강하고 꾸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라. 


최근에 네가 너의 인생 그림책이라고 알려 준 ≪틈만 나면을 읽었어. 정말 좋더라. 거기엔 틈새를 뚫고 나온 들풀과 들꽃들이 반복적인 리듬을 타고 등장하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길을 걷다가 길틈이나 돌틈 사이에 핀 꽃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 볼 때가 많았던터라 틈새에 핀 꽃과 풀들로 채운 그려낸 이 그림책이 더욱 와닿았어.


멋진 곳이 아니어도, 좀 답답한 곳에서도, 주인공이 아니어도, 한줌의 흙과 하늘만 있다면 마음껏 피어나겠다는 작은 꽃의 다짐이 스스로를 충분히 여기겠다는 나의 다짐과 잇닿았어. 책 속에서 틈을 뚫고 나온 꽃이 나답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어떠한 한계와 결핍도 괜찮다고, 나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 틈새에 핀 꽃으로 사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그렇게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작은 꽃의 씩씩한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70%로 사는 연습 


지금 내가 피어난 곳에서도 나 자신에게 충분히 충분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게 상담 선생님께서 숙제를 하나 내주셨어. 70%의 삶을 살아 보라고. 계획도 70% 정도만 세우고, 그 70%의 계획 중 70% 정도만 해내도 잘했다고 얘기하는 연습을 하라고 말이야. 120%의 계획을 세우고 그 중 간신히 반 정도 해낸 뒤에 오늘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무사한 날들이 떠올랐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보고 싶은 숙제였지.


연초에 이런 결심을 하고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을 한지 4개월 정도 됐어. 그리고 그 과정은 꽤나 복작스러웠어. 나 스스로를 충분히 여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 나 또 ‘충분히 여기기'를 과하게 집착했나 싶네. 허허. 


처음엔 ‘만족감'이라는 감각에 집중했어. 내가 어떤 순간에 만족감을 느끼는지 마치 코난처럼 예리하게 관찰했고, 그 리스트를 수집해서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했지. 


일단 일에서의 성취감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지금 난 책 한 권 낸 초보 에세이 작가고, 그림책 작가로서는 지망생이다보니 일에서는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웠어. 무엇보다 돈을 못 버니까.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던 연재 원고와 글쓰기 강의 모두 임신과 유산과 맞물려 계약기간을 끝낸 뒤 새로운 일거리를 구할 새가 없었지. 다시 구할 에너지도 없었고. 이렇게 된 거 계속 미루던 내 그림책 작업에 열중하자 싶었어. 일에서 돈이 따라오지 않으면 어디에서 성취감을 얻어야 할까 싶었는데, 그나마 만족감을 짜낼 곳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는 거였어. 그리고 내가 목표로 한 작업시간을 잘 지켰을 때 오는 뿌듯함. 일단 현재는 거기까지만 생각하자고 마음 먹었어. 이러면 내 만족감이 40프로 정도는 채워지는 느낌이었어. 


일에서 다 채울 수 없는 나머지 30프로의 만족감은 내 일상에서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 평소보다 한시간 일찍 일어나서 글을 쓰고 기도를 하는 모닝 루틴을 지키고, 아이와 남편이 어린이 집과 회사로 가면 아침 운동 1시간을 했어. 라면을 매일 먹을 수 있을 만큼 라면을 좋아하지만 건강을 위해 건강한 끼니를 요리해 먹는 것도 만족감을 주더라. 날씨가 따뜻해질 수록 산책 나가려는 노력도 많이 했어. 점심 먹고 잠깐이라도 산책을 하고 오면, 환기도 되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자연을 보면 덩달아 나도 활기를 얻었지. 

일단 시작은 좋았는데, 지속하다보니 내가 점점 만족감에 집착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어. 만족감도 일종의 감정이라 다른 감정이 그러하듯 계속 내게 머물지 않고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데, 만족감이 증발하면 불안하고 우울했어. 


그즈음 SNS를 생각없이 넘기다가 어떤 자기계발 콘텐츠를 봤는데, 죽도록 하라는 요지의 짧은 영상이었어. 죽도록 할 각오가 없다면 새로운 커리어로 도전할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류의 자극적인 영상. 또 월드컵 시즌을 보내며 선수들이 죽기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도 저렇게 해야하지 않나 싶었지. 지금 내가 가려는 ‘충분'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들을 보며 잔잔히 불편했어. 나를 충분히 여기며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 나태한 다짐일까? 이렇게 살아도 나는 괜찮을까? 결국 실패자가 되진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는 70프로로 사는 것도 못하는 인간이네 하며, 또 스스로를 비난하고 말았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기도 하더라. 나는 이제는 무언가를 죽도록 하면서 살고 싶진 않거든. 그럴 에너지도 없고. 그래서 결국 반강제로 70프로, 혹은 그 이하의 삶을 살았어. 그런 내게 충분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건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러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하나 느낀 것은, 내게는 70프로의 스스로를 충분히 여기는 삶이 더 오래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거였어. 가장 최상치의 나를 뽑아내기 위해 채찍질 하는 것은 10대, 20대의 내가 종종 해왔던 방식이었고 결국 나는 지쳤다는 걸 직접 겪어 봤으니까. 


70프로의 나로 사는 건 

나를 나태해지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건강하게 하는 길이란 걸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어. 



여전히 필요한 피어남의 노력


70프로의 삶도 여전히 노력은 필요하더라. 


“충분해"라는 말이 

“노력 적게"와 동의어는 아니었어. 


나는 그게 조금 헷갈리기도 했거든. 70프로로도 충분한 삶은 노력이 부족한 삶일까 싶어서. 하지만 해보니 70프로의 삶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 


≪틈이 나면에서 꽃들이 돌틈과 벽틈 사이로 피어나려면 좁고 좁은 틈을 비집고 튀어나올 노력을 해야하지. 일단 피어나기 위한 과정에서의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긍지'였어. 자기의 모양대로 어디서든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면서 그런 자신 자체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이란 걸 확실히 느꼈어. 


스스로에 대한 긍지를 품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나 주변과의 비교, 혹은 환상 속 나 자신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기대와의 비교를 멈추는 게 필요했어. 내가 피운 곳이 그저 어느 작은 틈이란 걸 알았을 때 초라해지기보다, 이런 틈에서도 피워냈다는 긍지를 갖는 것이 중요했지. 내가 피운 꽃은 주인공 급인 화려한 꽃들보다 작고 여려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고. 그렇게 내가 피운 하루에 대해 그 모양이 어떻든 충분하다는 긍지를 가질 노력도 내겐 필요해. ≪틈이 나면을 읽고 나 자신에게 충분하다는 말을 해주는 것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아. 


최근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드라마를 봤어. ‘여름’이라는 여주인공이 세상과 사람에 지쳐 퇴사를 한 뒤 ‘안곡’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로 무작정 와 적응을 해나가기 시작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그러는 중에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삶을 일구어가지. 마지막 화에서 여름은 이런 말을 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말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보았다. 제법 쌀쌀해진 새벽을 가르며 아직 해가 뜨기 전 거리를 마음껏 달렸다. 뿌듯했다. 충분하다. 집에 돌아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세상에서 물이 제일 맛있다던 할머니 말이 생각났다. 정말 그랬다. 충분하다. 빨래를 널 때 나는 탁탁 소리가 좋다. 그리고 손에 남은 비누향이 좋다. 충분하다. 마약을 탄 것 같은 도서관 오후 햇살에 살짝 졸았다. 맛있는 낮잠이었다. 충분하다. 책장 앞에서 서서 뭘 읽을지 고민하는 일은 늘 즐겁다. 설렌다. 충분하다. 정말 충분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하다. 살아보자.“


한동안 이 대사를 머금고 있다가, 나도 연습해보기로 했어. 


아침에 일어나 아이 등원 준비를 하는데 아이랑 실랑이하지 하지 않고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힐 수 있었다. 충분하다. 아침마다 시리얼을 찾는 아이가 오늘은 요거트에 포도를 넣어줬더니 맛있게 먹었다. 충분하다. 출근하려고 집을 정신없이 나서는 남편을 불러세워 오랜만에 뽀뽀로 배웅해줬다. 충분하다. 오전시간에 핸드폰 대신 차 한잔을 마시며 오랜만에 모닝페이지를 썼더니 하루의 첫 단추를 잘 낀 기분이다. 충분하다. 오늘까지 시샘에게 보내기로 한 편지를 벼락치기 하느라 고생했지만, 어찌됐든 무사히 발송할 수 있을 거 같다. 충분하다. 오늘은 이웃 친구들과 밥 먹기로 한 날이다. 가까이에 마음 나눌 친구들이 있다니 충분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사실 지금 충분하다. 살아보자. 

내가 나에게 충분하다는 이야기해주기까지 참 오래 걸렸네. 사실 머리로는 예전부터 알았지만 잘 안 됐던 부분인데 이제서야 좀 되는 기분이야. 그거 참 충분하다. 


이렇게 내가 나를 충분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한 기적은 

어쩌면 별이가 내게 준 선물일지도 몰라. 


그동안 충분히 충분했을 시샘아, 너역시 정말로 잘 해냈고 수고 많았다.

앞으로도 우린 대단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을 거야.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틈만 나면

이순(글/그림), 길벗어린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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