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이 시샘에게
시샘아, 너의 정신없던 8월을 바통터치하듯 이어받아 나의 9월도 정신이 없었어. 그렇게 9월 끝무렵이 되어서야 네가 9월 1일에 건네준 편지에 뒤늦게 답장을 해. 9월에 많은 일을 통과해왔지만, 가장 짙게 남아있는 건 “실패”야.
내가 처음 도전해 본 그림책 공모전에서 떨어진 그 날, 수백 번 상상한 실패인지라 각오가 되어있었지만, 막상 그렇게 쿨하지는 못 하더라. 타격감을 고스란히 느껴 휘청했지. 맞을 걸 알았다고 맞았을 때 덜 아픈 건 아니니까. 떨어졌다는 결과를 본 뒤 애써 숨을 고르며 아이 등원 준비를 했어. 아무 것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아이를 보는데도 눈물이 날 것 같더라. 아이와 남편이 집을 나선 뒤에는 일단 불닭볶음면을 끓였어. 아침부터 불닭을 먹은 적은 없는데 그 날은 그래야만 될 것 같았어.
모닝 불닭을 먹으면서 생각했어. 역시 난 안 되는 건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혼자 끙끙거린 시간이 길었으니 이제는 좀 성취하는 경험을 하고 싶었는데. 그림책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시간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렇게 불닭볶음면의 얼얼한 맛과 흡사한
알싸한 실패의 맛을 곱씹었지.
그런데 문득 이 실패의 맛이
내가 처음 느낀 맛이란 걸 깨달았어.
그림책 영역에서 난 성공 경험도 없지만,
실패 경험도 없었더라.
첫 실패도 없이 바로 성공하는 기적 같은 게 일어났다면 물론 좋았겠지만, 그런 기적은 없었어. 돌아보면 내 인생에 뭐가 한 번에 잘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 늘 그렇게 아등바등해야만 했지. 그러니까 기적이 없다는 건 큰일은 아니야. 늘 그래왔듯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기도 했지. 그렇게 생각하니 입안에 머금고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던 실패의 맛을 조금은 삼킬 수 있었어.
너덜너덜 해진 마음을 처음 토로한 것이 너와 구원이었어. 아침에 혼자 떨어진 결과를 보고 나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남편이었는데, 출근하는 남편의 마음을 무겁게 할까봐 잔뜩 쿨한 척 했거든. 그리고 나서 너희에게 찌질한 내 속을 다 드러냈지. 이럴 때 새삼 느껴. 친구의 존재가 내 삶에 얼마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는지.
어쩌면 나와 타인이라는 경계가 남편보다 친구가 더 뚜렷하다보니, 그 경계가 주는 안전함이 있는 거 같아. 내 일을 자기 일 처럼 여기게 되기 쉬운 부부나 가족의 관계 안에서는 내 슬픔이 상대방에게 더욱 쉽게 전염되는 것 같거든. 나와 남편은 결국 숨기는 것 없이 서로의 속내를 나누는 편이지만, 난 종종 이야기 할 타이밍의 눈치를 보곤 해. 내가 나눈 슬픔으로 인해 남편의 마음에도 슬픔이 묻어 그의 하루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되는 때에는 마음을 나눌 타이밍을 뒤로 미룰 때가 있는 거지.
하지만 친구들은 조금 다를 때가 있더라.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내가 멀리 살기도 하다보니 서로의 일상이 깊게 섞여있지 않고, 내가 아무리 힘든 모습을 보여도 너희의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니까 더 마음 편히 내 속을 보이게 될 때도 있더라고. 그 날 아침 그 순간에 그렇게 든든히 내 곁에 있어줘서 진짜 고마워.
너희는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물어봐주며 그늘진 마음을 밖으로 꺼내주었어. 맛있는 거 먹고 스스로 잘 했다고 해주라며 보내준 배달 어플 쿠폰도 감동이었고. 그 쿠폰으로 나 혼자 먹는 점심 시간에 햄버거 두 개 플렉스 했어. 이와중에도 맛만 좋더라.
너희와 대화하다보니 요동치던 감정이 한 차례 정리되었어. 그렇게 좀 더 첫 실패를 받아들인 뒤에는 용기를 짜낼 수 있었고.
너도 알지만 내가 너희한테도 이 그림책을 제대로 안 보여줄 정도로 4년 동안 혼자 작업해왔잖아. 일단 시작은 내가 좋아서 만드는 그림책이기에 누군가를 만족시킬만한 그림책으로 만들 생각을 하면 온 근육이 굳는 기분이 들었던 거 같아.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게 두려웠어. 그래서 일단은 혼자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보자는 게 내가 나를 압도하는 평가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이었지.
하지만 실패를 맛본 뒤에는 이제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한 상황이니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덕분에 더 적극적으로(지극히 내 기준의 적극) 꺼내서 피드백을 받을 용기가 생겼어. 요즘 네가 추천해줬던 세 달 짜리 그림책 제작 수업을 듣고 있는데, 그 수업의 선생님께도 피드백을 부탁했어. 적나라한 피드백에 뼈 맞는 아픔을 느꼈지만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니 후련하기도 했어. 성장하려면 껍데기를 깨고 나가야 하는 아픔이 있구나 싶었어. 조금 피로하기도 해. 도대체 언제까지 성장해야 할까? 그냥 성장 안 하고 싶기도 한데, 안 할 수가 없네.
선택받지 못한 실패는 용기와 세트로 두려움도 심어 줬어. 크게 두 가지 두려움을 심어줬던 거 같아.
첫 번째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만드는 이것이 결국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어. 가치 없는 것을 위해 들인 내 시간, 에너지, 결국 나 자신까지도 가치 없어지는 망상이 날 괴롭혀 필요 이상으로 쪼그라들더라. 다행히 그건 망상이란 걸 알았어.
그 망상을 깨뜨리는 방법으로는 너가 내게 얘기해줬던 한 문장이 효과가 좋았어. 그 때도 아마 내가 그림책을 만들다가 힘든 어느 날이었을거야.
그때 너는 날 격려하며
“다정아, 이제 너에게 오는 좋은 말들을 그냥 믿어."
라고 말해줬었어.
그 말이 다시 떠오르더라.
그래서 귓등으로도 안 듣던 날 향한 칭찬들을 떠올렸어. 때마침 내 그림책을 처음 보여줬던 친구가 전화가 왔고, 그 친구는 내게 말했어.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그 그림책을 보고 분명한 위로를 받았다고. 정말 좋았다고. 나는 그 말을 믿기로 했어. 너희가 메신저로 내 그림책을 보고 한 말들을 굳이 캡처했어. 이 세상에 내 책이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는 말. 내 그림책은 이미 좋은 길로 가고 있다는 말.
평소같으면 그래도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목소리가 훨씬 커서 잘 들리지 않았을 칭찬들인데, 이제는 그런 따스한 칭찬을 수집에서 마음속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어. 그렇게 하다보니 “네 책은 가치 없다”는 속삭임의 볼륨이 줄어들더라. 덕분에 점점 나도 다시 내 책을 가치 있게 볼 수 있었어. 누군가의 선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기꺼이 선택할 만한 책이란 걸 기억하기로 했어.
두 번째 두려움은 내가 실패를 거듭하다보면 그림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었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기까지 참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어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더 이상 해나갈 힘이 나지 않을 때가 올 거 같더라고. 그게 무서워서 또 마주할 실패가 두려워졌어. 그냥 적당히 내 선에서 안전한 길들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길들을 찾아내도 결국은 다시 마주하게 될 실패들이 있을 거 같더라고. 이미 지난 4년의 시간을 스스로를 안전하게 두려는데 충분히 집중해보기도 했고.
그러니까 어쩌면 그림책을 좋아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지.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봐야 계속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선명히 알 수 있겠다 싶더라.
그래서 난 한발 더 나아가 보기로 했어. 그 끝이 벼랑끝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말야.
이수지 작가님의 ≪선≫이라는 그림책을 보면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종이 같이 새 하얀 빙판 위에서 자신만의 선을 그리며 화려하게 스케이트를 타. 이수지 작가님은 이 책을 “그림 그리는 과정의 즐거움"을 빙판 위 스케이트를 활용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하더라. 빙판은 종이인 거고,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는 한 화가가 그리는 그림인 거지. 그 맥락도 와닿으면서 동시에 그게 삶의 여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
혼자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빨간모자의 아이가 멋드러진 점프를 시도하다가 그만 꽝 넘어지거든. 그렇게 빙판 위에서 곤두박질 해. 마치 화가가 그림을 그리다가 망한 순간을 묘사하듯 아이를 담고 있던 빙판이 종이 구겨지듯 확 구겨지는데 거기서 이입이 됐어.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다가 넘어져버린 아이가 지금의 내 실패를 연상시켜 주기도 하고, 구겨지는 종이가 내 마음을 대변해주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말끔한 새 종이에 다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려나 했는데, 넘어진 아이 옆에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 마음껏 넘어지는 장면이 등장해.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나와서 넘어지고 구르고 돌고 미끄러지면서 자유롭게 빙판 위를 채워. 실패인 줄 알았던 순간이 다시 아름다운 순간으로 바뀌어 가더라.
넘어지는 것,
그건 내 삶을 다 구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타격이 있을 수 있지만,
또 그렇게 별 거는 아닐 수 있다고.
오히려 마음껏 넘어지는 과정이 주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그런 말이 들리는 거 같았어.
그렇게 넘어지는 것을 너무 무서워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그림책 출판사들을 만나는 행사를 참가하기 위해 준비했어. 130여명의 작가가 30곳의 출판사 중 추첨을 통해 6곳의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는 행사였지. 오전 11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그곳에 있으면서 15분씩 6개의 출판사를 만났고 중간 중간 더 긴 대기시간을 견뎠어. 내 미팅 순서가 오기 10분 전 마다 계속 “괜찮아. 별 거 아니야. 오히려 좋아.” 이런 말을 주문처럼 걸었던 거 같아.
내 그림책을 들고 전문 편집자들을 만나는 과정은 정말 넘어지는 감각과 비슷한 감각이 느끼게 하더라. 쿵하는 타격이 있었고, 그러다가 의외로 부드럽게 미끄러져가듯 기분 좋은 부분도 있었지. 내 한계를 직면하기도 하고, 잘하고 있는 부분들을 인정받기도 했지. 서로 다른 편집자들이 주는 피드백 중 겹치는 피드백도 있었고 상반되는 피드백도 있었어. 다채로운 사람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들으며 내가 찾아야 할 건 어디에도 없을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답일 거라고 생각했어. 선택받고자 하는 간절함과 최선을 다하는 긴장감으로 꽉 찬 강당의 공기가 내겐 좀 무거워 틈 날때마다 비상계단 쪽에 홀로 앉아 숨을 돌렸어. 어쨌든 할 수 있는 걸 진심을 다해 한 거 같아.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함께할 가능성이 있는 출판사들을 만나기도 해서 힘이 났어.
벼랑 끝을 각오하고 어렵게 뗀 한 발짝 끝에
다시 다음 발짝을 뗄 수 있을 거 같기도 해.
그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너희 집으로 향했지. 서울에 가면 무조건 카페 세 곳 정도는 가서 그리웠던 도시의 문화를 향유해야 하는 나인데 말야. 이날은 편의점만 들러 생전 안 먹던 매운 닭발을 사 들고 바로 너희 집으로 갔어. 내가 먼저 도착해 널 기다렸고, 너는 마라샹궈와 함께 집에 도착했어. 너의 하루도 나의 하루만큼이나 얼얼한 날이었구나 싶었어.
각자의 이유로 빨간맛의 해소가 필요했던 우리의 하루 끝이었지. 불닭볶음면부터 매운 닭발과 마라샹궈까지, 내 실패의 여정에 빨간 음식들이 중요한 소품마냥 계속 등장하는 게 완성도 높은 장면을 만들어주는 듯 하네.
어쨌든 이번 넘어짐을 일단 잘 넘긴 거 같아. 내가 넘어진 자리로 와 함께 굴러주어 고마워.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선≫
이수지(글/그림), 비룡소(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