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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슬픔에 끝에서 내가 만난 것은

시샘이 다정에게

그러게 몇 달 전. 그날. 기억나. 우리 둘 다 꽤나 힘든 날이었지. 너는 몇 년 간 만든 그림책을 가지고 행사에 갔었고, 나는 그날 소개팅으로 만나던 사람과 끝난 날이었지. 너는 불닭볶음면을, 나는 마라샹궈를 사서 꽤나 매콤한 밤을 보냈잖아. 소개팅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었지 싶은데, 오랜만에 되게 ‘이런 사람이면 만나고 싶다’하는 멋진 사람을 만났어서, 그 만남에 대한 기대가 있었나 봐. 이전의 소개팅과는 다르게 꽤나 후유증이 있었어. 아니다. 비단 그 사람에 대한 아쉬움만은 아니었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니까, 내가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더라고. 꼭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엇을 가져서 좋아하고 아니어서 싫어하고 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냥 내가 갖추고 있고 싶은 것들이 있잖아. 매력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 성공한 커리어나 안정적인 경제력이라든지, 아니면 멋진 취향과 취미를 가진 삶이라든지. 그런데 나는 내가 주고 싶은 것들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 내가 그간 외면했던 내 비루한 현실들과 마주하며 현타가 온 거지.



슬픔이 끝에서 내가 만난 것은

행복이 아니라 허무였어


사실은 나 그전까지 한동안은 나에 대해 만족스러웠던 것 같아. 긴 시간 고민하던 문제들을 모두 해결했다고 생각했었거든. 나를 힘들게 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주위에 좋은 사람이 가득해서 관계에 대한 고민도 끝났고, 퇴사하고 2,3년 정도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며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찾았고, 어렸을 때부터 나를 힘들게 하던 우울함도 사라졌었어. 삶에서 처음으로 넉넉하게 행복과 안정감을 느꼈지. 그동안 나를 힘들게 하던 것이 다 끝났으니 나는 앞으로 행복할 일 밖에 없겠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닌 거야. 그동안 묶은 감정과 문제들을 해결하느라고 뒤로 밀어놨던 문제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거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세상이라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이 삶에 중요했었어. 어찌 보면 나는 일적인 성취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더 꿈이었거든. 그런데 정작 나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고 있더라고. 거기다 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긴 했는데, 따지고 보면 이제 막 시작인 거야. 내 주위 친구들이 차근히 커리어를 쌓아 나를 각자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었는데 말이야. 결혼한 친구를 봐도 초라해지고, 일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봐도 초라해지고. 그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내가 작게만 보이더라고. 그간 나를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만들던 우울함이 없어진 것도 처음엔 되게 특별하게 느껴졌는데, 점점 별 게 아니더라고. 나는 우울감만 없어지면 내가 되게 밝고 긍정적이 되고, 의욕적으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우울함이 없어지면 그저 우울함만 없어지는 거더라고. 의욕을 가지고는 것, 성실한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시 노력해야 할 숙제였어.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이룬 것 없이 다시 출발선일 뿐이라는 게 허무했어.



멈춰진 시간과

잃어버린 자유


요즘엔 내 삶에 대한 기록을 멈췄어.
살면서 이 정도로 내 얘기를 하기 싫은 시간은 처음이야.


SNS도 안 올리고, 일기도 안 쓰고, 사람들과 대화도 별로 안 해. 너는 알잖아. 내가 얼마나 내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지. 또 내가 뭘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하는지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지. 얼마나 심했으면 제일 친한 친구들한테도 기록변태 소리를 듣잖아. 맞아. 너네랑 나누는 대화가 너무 즐거울 때면 녹음을 하고, 올해 배우기 시작한 춤은 처음 배운 날부터 매주 레슨하고 느낀 걸 글로 남겼어. 재작년에 목공 배울 때는 3개월간 주 5일씩 다니던 수업인데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 1시간씩 그날 느낀 것들을 글로 적었었어. 집에 사람들이 놀러 오면 매번 같이 ‘방명록사진’이라고 해서 함께 사진을 찍었고. 특히 퇴사하고 나서는 더 심했던 것 같아. 매일 회사만 가던 일상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프로젝트를 하고, 또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까. 때로 힘들 때도 얼마나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던지, 그런 감정들 역시 또 기록했었지. 배우는 것, 내가 만난 것,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꼭 행복하고 잘하는 것만이 아니더라도. 힘들고 좌절하고 우울했던 것까지도. 슬픔까지도 하나하나 소중했어.


그런데 요즘엔 싫은 거야. 예전에는 아무리 힘든 순간이어도 이유가 있고, 이 시간을 발판으로 내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나 봐. 애를 쓴 결과가 허무라고 느껴지니 딱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다시금 몰려온 삶의 허무함들 물리칠 힘이 없는 요즘이야.


열심히 하던 기록을 멈추니, 주위사람들이 슬슬 나를 걱정하기 시작하더라고. 다들 연락해서 괜찮냐고 물어봐. 저번에 너랑 통화할 때 네가 잘 지내냐고 했던 말에  ‘그럭저럭 지내’하고 말했던 게 생각나. 차마 잘 지낸다는 말은 안 나오더라. 그때 네가 다시 ‘왜”라고 물었는데, 사실 더 말하고 싶지가 않았어. 글쓰기를 멈춘 것처럼, 말하는 것도 다 멈추고 싶었거든. 말로 계속해서 내가 힘들게 느끼는 것들을 되짚어 말하기도 싫고, 말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슬플 때 읽는 그림책


얼마 전에 진행하는 그림책 모임 때문에 서점에 갔어. 거기에서 내가 나를 고른 책은 우리는 언제나 너를 믿어라는 책이었어. 이 책은 다양한 동물들의 모습을 그리며, ‘믿는다’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책이야. 거북이는 느리지만 꾸준한 힘을 믿고, 개구리들은 자신들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멋들어진 음악이라고 믿고, 공작들을 다들 자신들을 보면 감탄할 거라고 믿어. 각자 자신의 모양대로 자신을 믿고 있었어. 나는 원래 이렇게 반복된 문장의 그림책보다는 스토리형식의 그림책을 좋아해. 이렇게 대놓고 긍정적이고 따뜻한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책보다는 은근한 깨달음이 은유적으로 감추어진 책을 더 좋아하고. 그런데 그날은 그냥 믿는다는 말이 반복되는,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따뜻한 이 책이 좋더라고. 사서 책장 한가운데 세워두고, 남은 올해의 시간 동안 곱씹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여전히, 요즘도 종종 살고 싶지가 않아. 왜 이렇게 나는 생의 의지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의 표지를 봤어. 피식 웃으며 생각했어. 진짜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런 책을 샀을 리 없다고. 요즘 한껏 부정적이었지만, 사실 마음 깊숙이로는 알고 있어. 나는 사실 살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고. 나는 그저 잘, 살고 싶은 거구나. 그래서 책 속의 무수한 말들로 여전히 나를 격려하고 다독이며 나에게 힘을 주고 싶구나.


나는 살고 싶지 않은 중에도 끊임없이 살고 싶어 해. 나는 나를 미워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나를 사랑해. 가끔 지칠 때,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그 마음들이 나를 무너지지 못하게 붙잡아. 지난번 만났을 때 네가 건넨 말과 위로에 ‘다정아 나는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여전히 나를 위해우리 ≪우리는 언제나 너를 믿어≫ 같은 책을 사고 있으니까.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우리는 언제나 너를 믿어
베스 페리(글), 몰리 아이들(그림), 김세실(옮긴이), 나무말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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