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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Oct 17. 2023

살아있음의 기쁨

시샘이 다정에게

다정아, 어렸을 때는 내가 겪는 일이 다 네가 겪는 일과 비슷했고, 네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다 느껴본 것이라 네 이야기를 내가 겪은 것처럼 온전하게 느끼고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었어. 그런데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아. 특히나 유산이라니. 사실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는 막연히 우리에게 일어날 거라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어. 아직 나에게는 ‘내 아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낯선 일이라, 너가 겪은 일의 무게 앞에서 위로의 말도 건내기조차 쉽지 않았어. 그 때 그나마 내가 너한테 전할 수 있던 것이 그림책 한 권이었어. 유산 후의 첫 통화에서 네가 너무 일찍 떠난 아이의 이름을 미처 지어주지 못한 것에 슬퍼하던 것을 기억해. 꽤 시간이 지나 네가 아이에게 ‘별’이란 태명을 지어주었다는 것을 듣자마자 <새의 모양>이라는 책이 생각났었어. 새가 가진 다양한 삶의 모양을 통해서 생명의 탄생과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책이야. 책의 내용만 보고서도 임신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지만, 너에게 유독 이 책을 주고 싶던 이유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어. 마지막 장면에서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이 꼭 별처럼 보이거든. 그 별을 보면서 별이를 같이 기억하고 싶었어. 책을 보면 새의 모양이 참 다양하고, 삶의 모양도 다양해. 그런 것처럼 별이도 네 삶에 별이 만의 모양으로 함께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도 참 이별은 아프지. 나는 네가 별이가 떠올라 마음이 시큰해지는 날이 올 때, 언제든 아린 마음과 그리움을 같이 듣고 싶어. 위로보다는 함께 별이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너에게 전해봐.


자기직면의 부작용


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비슷한 감정의 시기를 겪을 때가 많았잖아. 네가 바닥까지 내려앉던 그 때에 나 역시도 그러했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면면과 마주하며 이전까지 알던 자신보다 더 ‘나’보다 깊숙한 각자의 바닥을 봤 봐오지 않았나 싶어. 너가 마음 속 깊이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에서 허우적거리는 너를 봤듯이, 나도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으로 기력없이 바닥에 눌러앉아버린 내 모습을 봤어.


지난번에 말한 것같이 일도 연애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그냥 일인분어치 어른의 모습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내 모습을 낯낯하게 마주하면서 스스로에게 꽤나 실망을 많이 했었어. 그런데 기도를 하다가 진짜 내 문제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빠져서 그런 내 모습을 알면서도 변하려고 하지 않고,’나는 상처받았어, 나는 지쳤어’라고 주위 사람들과 내 기질, 환경 탓만 하며 무기력하고 게으른 삶에 주저앉아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 이제는 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목사님과 친한 지인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변하고 싶은데, 내 삶에 박혀있는 이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을 어떻게 없애야 할지 모르겠다. 라고 얘기했었어. 그런데 그 때 내가 들은 얘기는 ‘수지야,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때?’였어.


생각하지 못한 소리여서 조금 당황을 했던 것 같아. 사실 내가 내 연약함에 대해 말했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누구보다 내 마음상태가 건강하다고 생각했었거든. 나는 평생을 자기성찰하고 내 마음을 다독이는데 몰두해있었으니까. 지금 하는 일도 그림책과 대화를 통해서 어른들이 자기를 돌보고 회복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사실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가운데에서도, 내가 바랬던 건 어떤 해결이라기보다 대단하다는 칭찬이었던 것 같아. ‘자기의 못남까지 볼 수 있다니 너 되게 훌륭하다. 너 되게 건강하다.’그런 말들. 그렇게 내 못난 모습들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들은 얘기는 정신과를 가라는 소리인거야. 목사님도 힘들었던 시절에 상담과 정신과 진료를 둘 다 받은 적이 있으셨는데 자기는 상담보다는 정신과가 더 잘 맞았다고. 자신의 문제를 바로 짚어주고 처방해주니 도움이 되었다고. 그 때 있던 한명 언니도 ADHD로 정신과에 꾸준히 다니고 있었는데, 자기도 병원에 가서 약 먹으면서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자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심리검사들에 대해 관심이 많잖아. mbti, 애니어그램같은 심리테스트도 좋아하고, 얼마 전에는 나에 대해서 좀 더 정확히 진단받고 싶어서 tci, mmti,문장완성검사까지 받고 심리해석과 상담도 들었었고.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는 얘기에도, ‘우와, 그것도 재미있겠네요!’하고 말하고, 조만간 한 번 가보겠다고 얘기를 했어. 그 때까지는 괜찮았어.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슬슬 기분이 안 좋더니 한 이틀동안은 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매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었지. 마라샹궈를 먹으면서 생각했어.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보통사람들보다는 조금 우울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질대로 휘말려서 우울하게 살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었거든.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모두 밝은 아이로 생각할 정도로. 너무 열심히 노력했는지 정말 내가 내 입으로 내가 힘들다고 말하기 전에는 아무도 못 알아챌정도로 밝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애써온 내 삶의 결론이 결국엔 정신과에 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병원에 가지 않고도 건강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던 내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더라고.


나를 아는 괴로움


다정아 너도 공감할지 모르겠어. 나에게 솔직해지고 깊이 나를 알아갈 수록 나의 좋은 점보다는 내 안의 모순과 편협함을 더 많이 보게 돼. 그게 꽤나 괴롭게 느껴졌어. 그 맘 때쯤 하고 있던 일들도 다시 멈추기 시작했던 것 같아.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자기 내면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해보니까, 이게 너무 괴롭고 좋은건지 모르겠더라고. 나를 알수록 나의 못난 모습만 더 많이 보이고, 그렇게 못난 내 모습을 계속해서 보니까 자존감이 계속 낮아지고,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 분명 언젠가는 나를 알아가는 게 기쁨이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 그래서 내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 자기직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가 해도 되는걸까. 어디서부터 잘못이었을까. 나를 너무 깊이 파면 오히려 건강해지지 않는구나.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가 적절한 수준인거지. 그걸 알 수가 없더라고. 사람들한테 프로그램을 할 자신이 없었어.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고 돌봐주라고 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한 결과가 현재의 내 모습이라면 추천할 자신이 없었달까.

그래도 결국엔 정신과 상담 예약을 잡았어.

왜냐하면 별 수가 없어서.


나는 정말 내 삶을 회복시키려고 많이 노력을 해왔었잖아. 때로는 열심히 살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서 휴식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보기도 하고. 사람들과 많이 만나보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해보기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해봤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내가 아는 방법이 아닌 게 필요해서 얘기를 들은 대로 한번 가본거지.

사실 과거에 관계적으로 힘든거나 우울함들은 사실 내 안에서 많이 해결이 된 편이었고 요즘 고민하던 문제는 일을 제대로 안 하는 부분들이었어. 프리랜서로 살면서 완전히 어그러진 생활패턴, 무기력하게 보내온 시간 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게으름을 아무리 내가 마음을 먹고 노력해도 바꾸기가 쉽지 않더라고. 내 몸에 삶을 의지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육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다고. 수없이 시도했다가 포기한 미라클모닝, 다양하게 써봤던 스케줄러, 여러가지 스토리와 작업메이트들과 잡아놨었던 작업시간. 그런데 나는 조금만 힘들면 나를 너무 우쭈쭈하며 안아주던 습관 때문에 ‘해야겠다’마음을 먹어도 너무 쉽게 침대에 눕고, 제출을 미루고, 포기해버리고 마니까.

나도 의사선생님께 너가 상담하며 들은 것과 비슷한 얘기를 들었어. 나도 나의 기준이 높다고.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말라고. 그런데 나는 이 말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았어. 너는 육아를 하며서 짧게 나는 자유시간에 일도 하고, 가끔 여행도 하려고 노력하잖아. 나는 너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열심히 보내는 사람을 못 봤거든. 그런 너에게 상담 선생님이 “70%만 하세요.”하는 건 이해가 가는데, 나는 하루 종일 누워서 유튜브만 보면서 하루하루를 날려버릴 때가 있는데, 이런 나에게 기준이 높다니. 너무 잘 하려고 하지말라니. 애시당초에 한 게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선생님이 너무 잘하고 싶어서 도리어 아무것도 못하는 거라고 얘기해주셨어. 그리고 진단을 위해서 우울증 검사, 그리고 여러가지 성격검사 해석을 받았는데,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우울증이나 무기력이 없다는 거였어. 수지씨는 잘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성취와 성공을 하지 못하니까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느끼는 거라고. 그러면서 내가 받은 진단은 생각치 못하게 ADHD였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방송이나 책에서 요즘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많은 사람들이 ADHD라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예전에 관련 책을 읽어봤었어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ADHD는 막 수업시간에 뛰어다니고,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되는 이미지였어서 내가 ADHD일거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 그런데 ADHD가 가지는 어려 특징들을 보니 내가 내 삶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것들과 비슷하더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손을 꼼지락거리고 휴지를 잘게 쪼개던 모습부터, 주어진 일에 바로 몰두해서 집중하지 못하고 미루거나 제대로 마치기 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 덜렁거리고 정리를 잘 못하는 것, 스트레스를 받으면 충동적으로 바로 편의점에 가서 먹을 걸 산다던지 하는 모습들. 무엇보다 일을 할 때 나 자신을 방해하는 것같던 내 모습들이 대부분 ADHD의 특징하고 많이 연관되어 있더라고. 


그제서야 아무리 나를 위로하고 다독여도, 그래서 우울한 감정들을 모두 해결했는 데도 불구하고

주저 앉아서 변하지 않던 내 모습의 진짜 원인을 찾은 것 같았어. 



살아 있다는 건 눈물이 나는 거네


《살아 있어라는 그림책은 반복적으로 살아있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와. 한 아이의 시선을 따라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답을 찾아가지. 누워서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뱉으며 아이는 말해. “살아 있다는 건 숨 쉬는 거네.” 하늘을 나는 새와 달리는 치타를 보면서는 살아 있다는 건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나무를 보면서 깨닫지. 나무는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가만히 있지만 살아 있다고. 그러고 보면 살아있다는 건 꼭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무언가를 이뤄야지만 살아있는 게 아닌 것 같아. 아이는 꽃을 보며 또 생각해, 살아있다는 건 자라는 것이고, 피어 있는 거라고. 하지만 곧 이어 시드는 꽃을 보며 생각해. 살아 있다는 건 시드는 거라고. 난 이 장면이 인상 깊었어. 시드는 것이라고 하면 무조건 황폐하고 죽어있는 모습같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조차도 살아 있는 것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생애의 모양이구나 싶어서. 그림책 속에 아이가 꽃이 시드는 걸 보고 슬퍼져서 엉엉 울어. 그러면서 말하지. “살아 있다는 건 눈물이 나는 거네”


아이가 예쁘게 피어있는 꽃이 시들어서 푹 고개 숙인 모습에 눈물이 나는 것처럼 나도 한동안은 나를 보며 눈물이 났어. 나는 내가 가진 모습 중에  꽃처럼 예쁘게 피어있는 모습만 좋아했었거든. 가령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재미있게 해나가이는 모습.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용감하고 열정적인 것 같아”라는 말을 많이 해줬었어. 용기 낸 한 순간 외에는 회피하고 시작조차 못한 일들이 100개가 있었고 가끔 보여지는 몇몇개의 열정적으로 보이는 순간 외의 많은 순간을 가만히 누워서 있었는데 말이야. 나는 칭찬받고 인정받고, 내가 보기에도 멋지게 느껴지는 순간들만 나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은 ‘원래의 나’가 아니라 내가 좀 힘들었어서 쉬는 시간, 우울하기 때문에 나를 위로해야 하는 시간.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나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노력 대신에 늘 나를 위로하고 다독이기만 했던 게 아닐까.

나에게 솔직해지면서 나는 나의 여러가지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됐어. 우울하고 부정적여지기 쉬운 기질을 가진 나.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나, 나를 좋은 사람인 척 괜찮은 사람인 척 보이고 싶어서 애쓰는 착한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나, 습관적 무기력로 하루를 무의미하게 허비하느라 해야할 일도 제대로 못 하는 나. 속으로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무시했던 나, 정신과에 다니고, ADHD인 나. 나를 솔직하게 직면할 수록 알게 되는 내 모습이 한심했어. 그런데, 나 이제서야 나를 제대로 보는 것 같아. 처음엔 ‘난 이런 사람은 아니야’ 싶은 모습도 있는데, 곱씹어 볼수록 다 너무 내 모습이더라고. 

그림책의 장면처럼 자라는 꽃도, 피어있는 꽃 말고, 시드는 꽃도 살아있다고 말해. 새처럼 치타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도 살아 있는 거지만, 나무처럼 한 자리에 멈춰 있는 것도 살아있는 모습이라고. 활짝 행복하게 웃는 것도 살아있는 거지만, 눈물이 나고 아픈 것도 살아있다고 말해. 책을 보면서 내가 나쁘게만 보고 싫어하고 외면하고 오랫동안 ‘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들도 그냥 살아있는 내 모습,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처럼 느껴져. 살아 있는 게 별 게 아닌데. 꼭 훌륭하고 대단하고 멋져야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진 모습으로 별 걸 하지 않아도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삶인건데, 왜 이렇게 나는 삶을 거창하게 생각하면서 나를 꾸며대려 했을까.

새로운 내 모습을 인정할 때마다 삶이 나에게

‘이래도 너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겠어?’물으며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어. 

오랫동안 주저하다 이제야 내가 찾은 답은 ‘그럴거야’야. 


여전히 나를 사랑해죽겠는 그런 마음이 내 안에 있지는 않더라도. 의지를 들여 나를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말이 비단 연애 뿐 아니라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아. 평생을 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나를, 그래도 오랫동안 괴롭히고 외면해온 나를,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어. 어차피 죽을 생각이 없고. 더이상 떠날 수 없어 미련을 가진 과거도 없고, 막연한 환상으로 가득한 미래에 대한 환상도 없어. 그저 오늘을 살며, 오늘의 나와 화해하고, 오늘의 나를 좋은 길로 데려다주고 싶어. 괴롭힐 사람이 없어서 나를 들들볶던 시간을 멈추고, 어제보다 오늘, 내일보다 오늘 다정하겠다고.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허무를 넘어 살아있는 일상으로


병원에서 ADHD라는 얘기를 듣고, 그 날로 약을 받아서 꾸준히 먹고 있어. 약을 먹는다고 드라마틱하게 변화되는 건 없어. 한번 좀 느꼈던 건 내가 읽기로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읽었던 날이었어. 사실 나는 한권의 책을 읽으려면 중간에 핸드폰 한번, 스트레칭 한번, 커피 한번 마시느라 딴짓 없이 쭉 읽은 적이 거의 없었거든. 그런데 그 날은 그게 되더라고. 그게 약 덕분인지, 아니면 약을 먹었다는 기분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그래도 한동안 꾸준히 먹어보려고. 그리고 꼭 약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도 관리하려고 노력해. 맨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못 읽으니까, 나는 내가 못하는 사람이라고 확정지었었거든.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니까 내 일상에서도 무언가를 할 때,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나는 못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어’라고 마음 먹고 시도해보기 시작했어. 


그리고 1월 1일부터는 매일 큐티와 모닝페이지도 쓰고 있어.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하도 빠짐없이 50일을 이어가고 있는데, 다이어리를 늘 작심삼일 하던 내게는 매일이 기록갱신의 기적같은 나날이야. 물론 모닝페이지를 밤에 하는 날도 많고, 3페이지를 쓰는 게 정석인데 너무 피곤한 날은 1줄을 적어. 아주 엉망진창이지. 아마 옛날 같았으면 아침마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매일 3페이지를 채우지 못한다는 이유로 벌써 스트레스를 받아서 멈췄을지도 몰라. 그런데 내 주제를 알고, 내가 못하는 것을 분명히 아니까 이제 나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아. 다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꾸준하게 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일어버렸던 믿음과 내 삶에 대한 희망이 채워지는 것 같더라고. 과도한 기대와 실패 대신, 오늘의 나로 할 수 있는 만큼을 즐겁게 살아내는 걸 연습하고 있어.


요즘도 여전히 종종 우울하거나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순간들은 계속 생겨. 사람이 잘 안 변하잖아.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그럴 때 그냥 감정에 깊이 빠지지 않고, ‘그냥 살자’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눈 앞에 있는 것들을 하려고 해. 늦잠을 자면 잔대로 일어난 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다가 못한 게 있으면 그것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조금 쉬고 다시 하는 거야.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산다는 게 별 게 아닌데, 난 그간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한동안은 생각은 줄이고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그냥 살아보려해. 그냥.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산다는 건 그냥 사는 거네.


요즘엔 한동안 불편했던 ‘자기직면’에 대해서도 다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어. 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분명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를 정확하고 솔직하게 바라봐야 내 문제도 제대로 알 수 있고, 나아갈 길도 제대로 알 수 있고, 노력도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한동안 멈췄던 그림책 읽어주는 일도 다시 시작해야겠어. 이제는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아.


  


편지 속, 어른을 위한 그림책

≪살아있어

나카야마 치나쓰(글), 사사메야 유키(그림), 엄혜숙(옮긴이), 보물상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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